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집권 자민당 총재)가 9월 하순 치러지는 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14일 밝혔다.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등에 따른 국민 불신을 해소하지 못해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분석이다.
앞서 자민당 내에선 ‘기시다 간판’으로 다음 중의원 선거를 치렀다간 정권을 내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기시다 총리를 압박해 스스로 백기를 들도록 유도했다는 관측이다.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는 잠룡 간 경쟁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도쿄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새로운 자민당을 국민 앞에 확실히 보일 필요가 있다”며 “자민당이 변할 것임을 보여주는 가장 알기 쉬운 첫걸음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9월 새 총재가 선출된 뒤 퇴임할 예정이다. 내각제인 일본에서는 다수당 대표가 총리가 된다.
기시다 총리는 불출마 이유와 관련해 자민당 정치자금 문제를 언급하며 “소속 의원이 일으킨 중대한 사태에 대해 조직의 장으로서 책임을 지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말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이후 내각 지지율이 퇴진 위기 수준인 20% 내외에 머물자 당 안팎에서 퇴진 압박을 받아왔다.
자민당 일부 파벌은 그동안 정치자금 모금 행사(파티)를 주최하면서 티켓인 ‘파티권’을 할당량 이상 판 소속 의원에게 초과분을 다시 넘겨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아베파와 니카이파 의원 등에게 ‘뒷돈’을 준 의혹이 불거졌고, 검찰 조사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저출생, 고물가 관련 경제 정책에 실망한 지지층도 이탈했다. 일본 정부는 연초 저출생 대책 예산 마련을 위해 모든 국민에게 매달 500엔(약 4500원)씩 걷겠다고 밝혔다가 ‘증세 아니냐’는 반발에 부딪혔다. 물가는 뛰는데 임금은 못 따라가는 것도 국민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지난해 일본 물가는 4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지만, 물가를 반영한 실질임금은 2.6% 감소했다.
‘젊은 피’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43)도 출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점쳐진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아들이다. 참신한 이미지로 대중 지지도는 높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여성 후보로는 자민당 내 극우파의 지지를 받는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63),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71) 등이 거론된다. 둘 다 인지도는 높지만, 총리로서 역량을 증명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61)은 자신이 속한 아소파 수장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에게 출마할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2009년 총리를 지낸 아소 부총재는 ‘킹 메이커’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69)도 최근 각종 의원 행사에 참석하며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일본 정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고노 디지털상은 당 원로에겐 야생마 같은 인상이 있고, 모테기 간사장은 당내에서 인간미가 없다는 평가가 많다”고 전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관리위원회는 오는 9월 20~29일 중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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