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개인적으로는 신중하고 예의가 발랐으며 업무에도 충실했다. 하지만 “어떤 원대한 계획도 없었고 백성을 위한 발언도 하지 못했다”거나 “관리가 돼 자리가 승상에 이르도록 가치 있는 것을 제안한 적이 없었다”는 사관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성현의 재능을 지녔지만 곤궁하게 살면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고 탄식했던 사마천이 ‘적극 행정’보다 ‘보신’을 우선시한 이들을 곱게만 볼 리는 만무했다.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에 ‘마(馬)’자를 한 획 빼고 쓴 것엔 전전긍긍하면서도 “(관료로 재직하는 동안) 잘못을 바로잡는 말은 황제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사기>의 저자가 꼬집었던, 꼴불견의 관료 군상이 요즘 세상이라고 없을까. 기획재정부부터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까지 19개 주요 정부 부처 수장 이름을 나열한 뒤 각 부처가 내건 주요 정책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봤다.
2000여 년 전보다 좋아졌다고 선뜻 자신하기 힘들다. 대다수 국민에게 장관들은 이름과 얼굴 모두 낯설다. 각 부처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의 몇 마디 말을 제외하고는 장관들 입에서 나온 ‘청사진’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경제정책만 해도 구호가 무엇인지 가물가물하다.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역대 정권이 ‘지역 균형발전’(노무현 정부), ‘녹색성장’(이명박 정부), ‘창조경제’(박근혜 정부), ‘소득주도 성장’(문재인 정부) 식으로 지향점을 제시한 것과 대비된다. 물가 급등과 소상공인 연쇄 도산, 티메프 사태 등 현안이 터질 때마다 허겁지겁 ‘대응’하기 급급하다. 지향할 목표도, 성과를 판단할 기준도 흐릿한데 어떻게 일반 공무원 조직이 ‘열심히 일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나.
장관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 소위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맡은 분야에서 문제가 없어서도, 업무를 무리 없이 수행해서도 아니다. 야당이 포퓰리즘에 찌든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안’을 주장할 때도, 내년도 최저임금 시급이 1만원을 넘어서 자영업자·소상공인이 벼랑에 서게 됐을 때도, 반도체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에 한국만 손을 놓고 있을 때도 관련 분야 장관이 나서서 부처의 입장이나 향후 계획을 밝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저 “여당이 소수당이어서 법안 처리가 힘들다”는 푸념만 할 뿐이다. 진정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라면 장관이 앞장서서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모두가 몸을 사리다 보니 ‘스타 장관’은커녕 하다못해 지난 정부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부동산 가격 급등 책임)이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조국 사태’ 후 검찰총장과의 무리한 대립)처럼 ‘국민 밉상’으로 거론되는 이조차 드물다.
무색무취한 ‘경량급 내각’이 이어지는 폐해는 절대 작지 않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발전을 이어가려면 민과 관이 균형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리더십이 방향을 잃으면 국민은 헤맬 수밖에 없다. 우왕좌왕하는 사회에 ‘자유’나 ‘공정’은 사치스런 표현에 불과하다. 정부가 뚜렷하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커져 경제 발전 속도에 탄력이 붙을 수 있다.
국민은 뇌와 컴퓨터칩을 연결하는 뉴럴링크나 화성 이주 같은 일론 머스크가 쏟아내는 담대한 수준의 비전을 관료들에게 요구하는 게 아니다. 사마천이 말한 ‘백성을 위한 계획’ 정도라도 내놓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고위 책임자에겐 직무 유기다.
글로벌 경쟁의 파고가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이 정점을 지나는 것 아니냐는 ‘피크 코리아’ 우려가 여전하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각료들의 오늘날 소극적 행보가 자칫 후세 사가들이 쓸 <복지부동 열전>에 ‘국가 쇠락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오명(汚名)을 남기는 소재가 돼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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