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하면 사과인데 지구온난화로 사과 주산지가 정선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홍어는 흑산도가 아니라 군산에서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래도 지역 특산물을 잃는 도시가 있으면 얻는 도시가 있어서 다행인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서도 기차가 훑고 가는 들판과 산을 보고, 강과 계곡을 봤다. 물줄기는 여전히 새파랗게 흘렀다. 장마에 내린 비가, 여전히 계곡을 계곡이게 하고 강을 강이게 한 것이 기특했다.
갤러리 소현문에서 있었던 공룡낭독회가 생각났다. 공룡낭독회 전에는 수원 화성의 창룡문에서 공룡 퍼포먼스가 예정돼 있었는데, 하필이면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서 있어도 옷이 다 젖는 엄청난 비였다. 창룡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검은 공룡이 한 걸음씩 빗속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낯설고 압도적이었다. “브라키오사우루스의 거대한 몸같이 밀고 들어오는 폭염이다” 비대해진 날씨에 사로잡혀 쓴 문장이 떠올랐다. 공룡은 몇 걸음 걷다가 고꾸라졌다. 공룡의 등 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공룡 탈 안에는 홍석균 작가가 있었다. 나는 홍석균 작가의 퍼포먼스 덕분에 내가 쓴 문장이 살아있다고 느꼈다.
304 낭독회가 있는 ‘물레 책방’으로 가기 전엔 일행과 함께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공간에 들렀다. 참사 앞에서 우리는 절망했고 기억했다. 기억한다는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우러러봤다는 것이다. 친구는 추모 벽 앞에 한참 동안 서서 한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 나도 그 옆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러자 친구가 쓴 시가 내 마음에 폭 안겨 왔다. ‘내가 아는 가장 시 잘 쓰는 사람’을 생각하며 걸었다. 폭염에 갇힌 나는 폭염 속으로 뛰어든 사람처럼 걸었다. 걸으니까 땀이 났다. 304 낭독회가 끝나고 남아 있던 작가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내 세 번째 시집 <콜리플라워>의 해설을 쓴 김태선 평론가가 내게 물었다. “인주리 나오는 시 왜 뺐어요?” ‘저녁’이란 시였다.
“별로인 것 같아서요.” “그 시 좋았는데, 시집으로 나왔을 땐 빠져 있어서 궁금했어요.”
시 한 편이 공짜로 생긴 기분이다. 출판사에 보낸 메일을 뒤져 다시 읽어봤다. 좋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분명 쓰고 나서는 좋아서 시집 원고에 넣었을 텐데 어떤 마음의 경로를 지나 이 시를 버리려고 했을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버리려던 시를 다시 보게 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오늘 이 느낌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러면 버리려던 마음이 살리는 마음이 될지도. 어느 한 편도 미워할 수 없게 나 대신 시를 살려내는 마음들이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처서가 코앞이다. 절기는 이길 수가 없다. 오는 가을과 가는 여름이 자리바꿈을 할 것이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는”(문태준, ‘그맘때에는’) 며칠 떨어져 있으니, 아들이 몰라보게 자란 것 같다. 아,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시간은 마음이 커지는 시간인가. 너그러워진다. 원고 청탁이 고추잠자리처럼 날아온다. 겨울은 이미 먼 곳에 있지만, 눈송이 같은 겨울호 청탁이다. 얼른 언 손 녹이며 따스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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