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통일 강령의 요체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다. 이전 정강에선 한 번 비쳤던 이 표현이 신강령에는 세 군데에 걸쳐 부각되고 있다. 그 자체로는 누구도 시비 걸 수 없을 것 같은 이 말의 실제 의미는 위험천만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이어 이재명 대표가 누누이 주창하는 ‘나쁜 평화론’, ‘더러운 평화론’의 또 다른 수사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전쟁으로 수십 년 만에 다시 ‘전쟁의 시대’를 맞아 전 세계가 군사력 강화에 총력전으로 나서고 있는 이때 나 홀로 ‘반전’과 ‘평화’를 치켜들고 안보 갈라파고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당이다.
베트남 작가의 ‘나쁜 평화라도 좋은 전쟁보다 낫다’라는 말을 애용했던 문 전 대통령이 남긴 안보 유산을 되짚어 보자. 트럼프의 안보보좌관이던 존 볼턴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에는 문 전 대통령을 ‘조현병 환자’에 비유한 대목이 있다. 트럼프와 비핵화 협상 시 김정은의 기만적 의도를 꿰뚫었던 볼턴의 입장에서 김정은의 메신저를 자처하며 협상 지속에 병적으로 집착한 문 전 대통령이 그렇게 보였을 법하다.
두어 달 전 나온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면 볼턴 표현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그의 심정에 꽤나 이해가 간다. 문 전 대통령은 책 곳곳에서 김정은에게 인정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싱가포르 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것에 대해 김정은이 “죽은 싱가포르 회담을 내(문재인)가 되살려주었다며 거듭 감사하다고 인사하더라”고 했다. 재임 중 김정은과 총 38회 친서를 주고받았는데, 퇴임 전 마지막 친서에선 김정은이 “앞으로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인간 문재인은 변함없이 존경할 것”이라고 썼다는 것까지 소개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어쭙잖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나라를 안보 절벽으로 몰고 갔는데도, 적의 수장에게 좋은 소리 들은 게 그토록 뿌듯한 모양이다. 영변 핵시설과 풍계리 핵실험장에 관련된 북측 제안과 조치는 모두 사기와 쇼로 판명 났는데도 지금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이 90% 이상을 차지하는 북한의 핵연료 비중을 볼 때 김정은이 대미 협상 카드로 던진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 영변의 폐쇄는 핵 폐기는커녕 핵 동결에도 못 미친다. 핵 전문가 한 명 없이 기자들만 불러 입구를 봉쇄한 풍계리 핵실험장은 지난해 복구됐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말만 믿은 채 구조를 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의 지식과 판단력 부족이 실패의 주된 이유다.”(김병연 서울대 교수)
민주당 외교·안보 정강의 또 하나 방점은 ‘국익 중심 실용 외교’다. 나무랄 데 없는 것 같은 이 말 역시 함의는 위험하다. 좋게 얘기하면 ‘균형 외교’, 달리 말하면 ‘줄타기 외교’인데, 민주당은 신강령에서 이런 기조를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이념 편향의 진영 외교를 극복하고…’라는 문구를 추가했는데, 진영은 북·중·러 권위주의 진영에 맞선 한·미·일 자유 진영이고, 이념은 자유민주주의·법치·인권을 뜻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국익·실용이란 명분 아래 때때로 자유 진영을 벗어나 권위주의 진영에 서겠다는 것인가. 친중·친북 노선으로 한미동맹의 균열과 최악의 반일 기조가 형성된 게 문 정권 5년의 외교 참사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대표의 ‘셰셰’ 발언이 재차 연상된다. 그런 표현은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외교·안보관이기에 당 강령에도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기본 사회가 국가 재정을 볼모 삼은 포퓰리즘이라면, 맹목적 평화주의는 안보 포퓰리즘이다. 유권자의 나약한 마음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 있다.” 레온 트로츠키의 말대로 전쟁은 내 뜻을 반영하지 않는다. 진정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전쟁이란 말을 꺼낼 필요조차 없다. 묵묵히 힘을 기를 뿐이다. 전쟁 회피론을 꺼내는 순간 이미 적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적의 수장 김정은이 공공연히 전쟁을 떠들고 있는 때라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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