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 23일 16:5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SK그룹과 두산그룹 등 주요 그룹이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맡은 국민연금이 SK이노베이션과 SK E&S간 합병에 전격 반대 의견을 냈다. 의사결정을 담당한 총 9명의 수탁자책임위원회(수책위) 위원 중 단 1명의 차이로 반대가 결정될만큼 격론이 오간 것으로 파악된다. 쟁점은 '공정한 합병비율 산정'과 '대주주에 유리한 지 여부'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타깃은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이다. 국민연금 수책위는 두산그룹과 관련된 안건도 최근 수책위가 판단하기로 '콜업' 절차를 밟은 것으로 확인됐다. 두산그룹이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 안은 SK그룹 구조개편과 동일한 논란을 서면서도 여론의 반발이 더 컸던만큼 기존안을 고수할 경우 국민연금의 문턱을 넘기 쉽지 않을 것으로 풀이된다. SK그룹에서 찬성표를 던진 일부 위원도 두산 안건에 대해선 반대 의사를 피력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국민연금, 두산 지배구조 개편 안건도 수책위에 올려
23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결정하는 수책위에서는 총 9명의 위원 중 과반인 5명의 위원이 SK E&S와 SK이노 합병 안건에 반대하기로 했다.수책위 내부 회의에선 막판까지 격론이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SK이노베이션과 SK E&S간 합병비율 산정 과정이 논의에 올랐다. SK E&S의 기업가치는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각각 1과 1.5의 비율로 가중산술평균한 값으로,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의 가치는 시가를 기준으로 삼은 점이 문제가 됐다. SK이노베이션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3배 수준으로 역대 최저 수준인 상황에서 주가가 기준이되다보니 SK E&S는 상대적으로 고평가되고 SK이노베이션은 저평가 됐다는 주장이다.
경영계 측은 법상 합병과정에서 자산가치와 시가 중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된 점을 들어 반발했지만 반대측의 의사를 막진 못했다. 일각에선 대주주 일가가 지분을 직접 보유한 SK㈜의 100% 자회사인 SK E&S에 유리하도록 합병비율이 결정된 것을 문제삼기도 했다.
국민연금 수책위가 합병비율 산정과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지주사의 유리한 방향인 지를 중점적으로 살피면서 같은 논란에 선 두산그룹도 초비상이 걸렸다. 수책위 위원들은 이미 이달 초 SK그룹과 함께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안건을 수책위가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콜업’을 통과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은 수책위 위원 3명 이상 안건을 콜업하거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자체 판단하기 곤란하다 결정하면 수책위에서 안건을 다루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현재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분할해 두산로보틱스로 이동시켜 합병하는 안을 결의하기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내달 25일 개최한다. 국민연금은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주식을 각각 6.85%와 7.22% 보유하고 있다. 특히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민연금만 반대 의사를 표명해도 회사가 매수청구권 상한선으로 제시한 6000억원을 넘길 수 있어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더욱 큰 상황이다.
"SK보다 사안 심각"...원안 그대로 통과 쉽지 않을 듯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싼 비판도 결국 '합병비율의 적정성'과 '대주주의 유리한 방향인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두산로보틱스는 두산밥캣 주주들에게 두산밥캣 보통주 1주당 두산로보틱스 보통주 0.6317462주를 지급해 100% 자회사로 만든 후 합병하기로 했다. 두 회사 모두 상장법인인만큼 시가를 바탕으로 교환 비율을 결정했지만 양사의 가치평가에 대한 이견이 컸다. 지난해 1조3000억원을 벌어들인 두산밥캣과 192억원의 손실을 낸 두산로보틱스를 주가를 기준으로 합병하는 것은 현재 주가가 과도하게 고평가된 두산로보틱스에 유리한 구조라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반응이다.이번 합병으로 대주주들이 지분을 직접 보유한 ㈜두산이 수혜를 누리는 점도 SK그룹의 상황과 엇비슷하다. 지배구조가 마무리되면 ㈜두산은 그룹의 캐시카우인 두산밥캣 지분율을 간접 지분율을 기존 14%에서 42%까지 늘어나게 된다.
수책위 일부 위원들은 두산그룹 안건을 콜업하면서 이번 사안이 기금의 수익성과 직결된 중대 사안인데다 반대표를 던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위원들 사이에서도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무리한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SK 안건에 찬성했던 수책위원조차 “SK 합병보다 두산의 사업 재편안이 주주 침해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반대 의견을 시사했다. 한 수책위 위원은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이 무리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위원도 “다수의 주주들이 비판하는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국민연금의 수익을 위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어느 단체 추천 위원인지에 상관 없이 반대하는 입장이라 생각된다”고 전했다.
차준호 / 류병화 기자 chach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