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고모씨(41)는 최근 일본 여행을 간다는 직장 후배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가 민망한 상황에 처했다. 광복절인 15일 훗카이도로 여행을 떠난다는 후배에게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가 특히 컸던 곳인데 굳이 그 곳을 가야하냐는 말을 건냈다가 “유난이다”라며 면박을 당했기 때문이다.
고씨는 “후배가 ‘단지 광복절을 끼고 여름 휴가를 쓰면서 시원한 관광지를 찾다보니 훗카이도를 택한 것 뿐인데 왜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냐’며 일침을 놓는데 할 말이 없었다”며 “요즘 아무리 일본 여행을 많이 간다지만 광복절 만은 피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다들 생각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연희 의원실이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20일 국내 공항을 이용한 일본 노선 이용객(출입국 합산)은 138만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14만 7000명보다 20.8%, 지난달 같은 기간 130만3000명과 비교해 6.3% 늘어난 수치다.
특히 광복절을 낀 나흘 간 연휴(8월 15~18일)에 일본 노선에는 26만9000명이 몰려 지난해 광복절 연휴(8월 12~15일·22만1000명)보다 21.4% 많았다. 이기간 일본 규슈 남부 미야자키현에서 발생한 지진 영향으로 일본 정부가 대지진 주의보도 내렸지만 일본 노선 항공편 이용객 증가세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특히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선 3·1절이나 광복절 등 특정 공휴일에 일본 여행을 가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양상을 보인다. ‘역사 문제와 사생활은 별개’라는 이유에서다. 합리적 소비를 중시하는 2030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다. 역대급 장기 '엔저 현상(엔화 가치 하락)'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MZ세대를 유혹하는 요인이다. 저비용항공사(LCC)를 중심으로 저렴한 항공권의 공급도 이어지고 있다.
직장인 한모 씨(27)도 광복절에 휴가를 붙여 3박4일 동안 일본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다. 항공권 값이 편도 10만원대로 저렴하고 비행 시간도 편도 기준 한 시간 반 이내로 짧았기 때문이다. 한 씨는 “일본 관광지를 찾으면 한국인이 현지인보다 더 많았다”며 “특히 셀린느나 이세이미야케 등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 대기를 한 이들을 살펴보면 10명 중 9명은 한국인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솔직히 관련 유적지만 안 들르면 문제 될 게 있나 싶다”고 덧붙였다.
특히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개제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부정적인 반응이 더욱 격렬하게 나오는 편이다.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유명인이나 아이돌 가수들이 해당 공휴일에 일본 여행을 떠나거나 관련 게시글을 올렸을 때 비난에 가까운 강한 어조의 비판이 쏟아지는 것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의 멤버 연준은 광복절에 일본 거리 사진을 개인 SNS에 올리면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지적을 받고 공식 사과문을 올리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누리꾼들은 SNS로 몰려가 광복절에 일본 여행 사진을 올리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댓글 세례를 남긴 것이다. 그룹 스트레이키즈 멤버 필릭스도 광복절에 일본 애니메이션 챌린지를 예고했다가 비슷한 논란을 겪었다.
여행업계에선 광복절 연휴 일본 여행을 두고 여전히 중장년층 세대와 MZ세대간의 의식에는 간극이 있다고 귀띔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광복절 일본행 수요가 전 세대에서 전반적으로 늘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는 40대 이하 청년층이 주도하는 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이중적인 인식은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지난달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의 만 18∼3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7.3%가 일본에 호감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일본에 대한 신뢰도는 35.1%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과거사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51.9%)을 꼽았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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