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년층은 1950년대를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80년대에 대해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장년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미국 모두 오늘이 그때보다 훨씬 풍족합니다. 그런데 왜 못살던 시절을 그리워할까. 집단적으로 기억 왜곡 현상인 무드셀라증후군에 걸린 것일까요. 과거를 기억할 때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현상 말입니다.
어쩌면 당시가 지금보다 더 평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계층 간 격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가난했지만 다같이 잘살아 보려고 했었습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이유로 SNS를 꼽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끔은 타인의 SNS를 보고 자신의 처지와 비교합니다. ‘다들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비교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SNS에서 보는 것은 타인의 편집된 삶입니다. 남편 또는 아내와 싸웠다고, 애들 대학 떨어져 재수한다고, 여행 중 동반자와 싸워 손절 직전까지 갔다고 SNS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스타에는 멋진 장소, 좋은 일들만 넘쳐납니다.
물론 이런 타인과의 비교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때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춘천 서면에 ‘박사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가난한 서면 사람들은 강 건너 부자 마을에 과일, 민물고기 등을 팔아서 생활했습니다. 1960년대 그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자식 교육에 투자했습니다. 악착같이 일해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냈고 박사를 만들었습니다. 단위 면적당 박사가 가장 많이 나온 동네라 ‘박사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사회학자 송호근 교수는 박사마을을 “비교와 평등의식의 결과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시절 부모와 사회는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놓아줬습니다. 아이들은 힘껏 그 사다리를 올라갔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아이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 결과는 중산층의 나라였습니다. 1994년 한국의 중산층은 70% 육박하게 됩니다. 정부도 힘을 보탰지요. 재형저축, 청약예금, 청약부금 등을 통해 재산 형성을 지원했습니다. 물론 본질은 국민의 돈으로 공장도 짓고 아파트도 지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던 셈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역 간 격차, 계층 간 격차, 세대 간 격차 등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계층이동의 사다리는 붕괴됐습니다. 자신이나 자식 세대에 계층이동이 가능할 것이냐는 질문에 긍정적이라고 응답하는 비중은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역동성의 상실입니다.
2016년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2020년에는 ‘성혜의 나라’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유교적 가치관과 부딪쳤습니다. 그래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취직도 했습니다. 반면 92년생 성혜는 알바 인생이었고, 연애도 포기합니다. 10년간 한국 사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격차의 확대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최근 사회 지표도 이를 보여줍니다. 지난 7월 그냥 쉬었다는 청년(2030)은 70만 명이 넘었습니다. 사다리에 오를 의지도, 사다리를 고쳐줄 사람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내부에서 격차를 극복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의 ‘초격차 사회’로 진입하는 느낌입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은 귀기울일 만합니다. 그는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의 학생 선발에 지역 할당제를 적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대학 진학에 경제력(75%)과 거주지역(92%)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이 입시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지위의 대물림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가 수도권 인구 집중과 서울 집값 상승이라고도 했습니다.
근거의 정치함이나 사회적 합의 과정에 대한 우려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사회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누군가 제시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반가웠습니다. 이름 좀 난 인사들이 입만 열면 계층 사다리 복원을 말했지만 대안을 내놓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촉매제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청약통장을 다뤘습니다. 과거 중산층 재산 형성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청약통장이 이제는 로또의 도구가 되어가는 현상을 다뤘습니다. 달라진 청약통장 관련 제도도 살펴봤습니다. 정부는 41년 만에 청약통장에 넣을 수 있는 인정금액을 10만원에서 25만원으로 높였습니다. 돈을 더 낸 사람이 당첨 가능성이 더 높아진 거지요. 청약통장 제도개편이 저소득층의 부실한 사다리마저 걷어차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