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을 끝까지 잘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식자와 석학의 진중한 설명이나 강좌라도 본인 판단과 다른 주장에 차분히 귀 기울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언필칭 열린 마음, 객관적 수용 자세, 상대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편향성이 있다.
한국처럼 이성적 토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담론 체계, 개방적 대화가 부족한 극단적 대립의 사회에서는 더욱 아쉬운 대목이다. 진영 논리에 따른 일방적 주장이 넘쳐나고 협상과 협의, 절충과 타협을 죄악시하고 백안시하는 대립 풍조에서는 더욱 그렇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사회처럼 갈등 사안, 대립 어젠다가 많은 곳도 보기 어렵다. 매사 진영 논리가 크게 작용하다 보니 대개 기준은 우리 편과 네 편, 나에게 이롭냐 저쪽에 유리하냐에 따른 논쟁 같지도 않은 저급한 말싸움 천지다. 이런 퇴행은 쉽게 변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수준 낮은 논쟁장에서, 철 지난 이념이 난립하는 퇴행적 이념의 전쟁터에서 흔들리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어떤 나침판을 들고 어느 등대를 보면서 삶의 거친 바다를 항해할 것인가. 이는 비단 학생들과 사회 진출을 도모하는 청년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보다 효율적으로 좋은 성과를 낸다는 차원에서 몇 가지 요체를 생각해보자. 첫째, 광범위한 인문적 지식과 사회과학의 지식과 정보가 중요하다. 어문학·역사·철학·예술 등에 걸친 폭넓은 인문적 지식은 그 자체로 교양의 토대다. 여기에 정치·경제·사회·법률 등의 사회과학 지식의 기초 토대가 탄탄하면 논리가 타당해지고 문장과 말에 힘이 실린다. 요컨대 주의·주장의 근거가 실해진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이론과 검증된 전거를 들이대며 본인 생각을 슬쩍 얹는 식이다.
둘째, 반대 의견에 진중하게 귀 기울이는 신중함과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반대 목소리를 접할 때 저들은 왜 저렇게 주장하는지, 저런 논리를 펴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고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대척점의 논리 구조를 잘 뜯어봐야 한다.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인식 단계가 나아간다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 구조는 지금도 유효하다. 상반된 목소리나 논리에 주목하며 이를 극복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냉정함과 차분함까지 갖춰야 한다. 주의와 주장이 글의 주된 목표이면서 때로는 대안까지 제시해야 하는 대표적 논설문인 사설에서도 그렇다. 반대 입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이 전제가 될 때 깊이와 설득력이 더해진다.
셋째, 풍부한 어휘와 용어의 중요성이다. 가장 적확한 말을 선택해야 혼선이 없고 오해가 없다. 개념 언어를 많이 알수록 타인이 주장하는 논지를 오독하지 않게 된다. 다독과 정독을 병행함으로써 언어를 이해하고 숙지하면 좋은 주장의 글이나 말은 부차적으로 뒤따르기도 한다. 한자와 한문의 공부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가령 사람이나 사물의 본성이나 본바탕을 의미하는 성(性)이라는 글자에서 나온 말을 보자. 성격·성품·성질·성정·성미 같은 한자말에 성깔·성질머리 같은 순우리말과 합성된 용어도 있다. 본성·천성·품성·인성처럼 성 자가 뒤에 붙는 용어도 다양하다. 한자말은 우리말의 70%를 차지하는데, 이런 말들은 제각각 뉘앙스와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물일어설’(귀스타브 플로베르), ‘언어는 존재의 집’(마르틴 하이데거)이라는 말 그대로다.
넷째, 가급적 양비론·양시론을 극복하고 분명한 선택을 하는 게 필요하다. 열린 마음과 개방적 사고, 자기 교정 등 끊임없이 보완하는 자세는 배우는 학생과 아직도 미성숙한 사회 초년생에게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행동이다. 그래도 전후좌우 맥락과 국내외 사례를 충분히 공부하고 여러 차례 생각했다면 확신을 갖고 논리정연하게 자기주장을 선명히 펼쳐야 호소력이 생기고 공감도 자아낸다.
8년간 써온 글 중에서 최근 기사를 추려 <토론의 힘 생각의 격>(2022년, 한경BP) <논리의 힘 지식의 격>(2024년, 한경BP) 두 권의 책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찬반 토론의 이 코너가 단순히 논술시험 준비 차원을 넘어 청년 학생들의 착오 없는 진로 설정과 두려움 없는 삶을 영위하는 데 유용한 나침판이 되길 바란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생글생글의 이 칼럼을 담당해온 것에 작은 보람을 느끼며 혹여 없지 않았을 오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이렇게 마지막 여적(餘滴)을 남긴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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