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공무원만으로는 규제개혁을 시행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혁신 의지가 강한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민간의 관점’에서 강하게 추진해야만 개혁이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 23일은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를 2년간 이끈 김종석 위원장이 서울 광화문 규제혁신추진단 회의실에서 마지막 전체회의를 주재한 날이었다. 이날 김 전 위원장은 기자와 만나 “규제개혁은 일회성 개혁이 아니라 정부의 상설 기능이 돼야 한다”며 “민간 눈높이에서 규제를 개혁하라는 게 국정 지침인 만큼 민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정부 각 부처가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거나 기존 규제를 강화하려는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민간을 대표하는 규제개혁위원장과 관(官)을 대표하는 국무총리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현직 장관 7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16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임기를 마치신 소감이 어떤지요.
“지금 한국은 아날로그 시대의 규제가 디지털 시대의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을 절감했습니다. 공무원이 기업과 국민을 가르쳐야 할 계몽의 대상으로 보거나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 불필요한 규제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저수지 수질 관리처럼 규제개혁도 계속 고치고 정비해야 합니다.”
▷한국의 규제는 여전히 심한가요.
“연간 1000개 정도 신설·강화 규제가 심사 테이블에 올라오고 이 중 10%인 약 100건이 기업과 국민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요 규제입니다. 불량 규제를 사전에 걸러내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불량 규제를 막으면서 현존하는 규제를 개속 개선해가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규제 개선 성과가 있었습니까.
“현 정부 출범 후 최근 2년 동안 ‘개선 권고’한 규제 비율(80.4%)이 전임 정부(60.0%)에 비해 크게 높아졌습니다. 민감한 규제일수록 증거와 데이터에 기반해 이해관계자들과 꾸준히 소통한 결과입니다. 위원회 개선 권고는 법률에 따라 담당 기관이 반드시 수용하게 돼 있습니다.”
▷인상 깊은 규제개혁을 꼽는다면요.
“대형마트 월 2회 의무휴업 제도를 개선한 것입니다. 일요일에 의무적으로 휴업하던 것을 시·군·구 단위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여론을 반영해 휴업일을 평일로도 할 수 있도록 완화한 것입니다. 진통이 극심했던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도 이해관계자와 환경부, 지자체 간 꾸준한 대화를 통해 40년 만에 착공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황당한 규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보건복지부가 국민 자살률이 높다며 30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자살 예방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게 하자는 규제를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30인 이상 기업은 연봉과 복지, 처우가 좋은 곳입니다. 이런 기업의 직원 자살률은 상대적으로 낮을 것인데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규제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관료들이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 것을 방증합니다. 어떤 지역의 교사들은 충효 교육을 받아야 하고 식당 주인은 위생 교육을, 숙박업자들은 서비스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국민을 가르칠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공무원들이 영향력을 높이려고 규제를 만든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받아야 할 법정 의무교육이 10년 전 90여 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625개나 됩니다. 정부 산하기관에 ‘교육 일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의심까지 듭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발효된 이후 고용노동부 출신 OB(퇴직관료)들의 몸값이 크게 높아졌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의 소극행정도 문제로 꼽힙니다.
“공직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변화입니다. 공무원은 물려받은 지침대로 하는 게 편합니다. 규제개혁의 최대 장애는 소극행정입니다.”
▷소극행정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은 무엇입니까.
“감사원이 적극행정의 개념을 넓게 해석해야 하는데, 역대 감사원장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게 없습니다. 감사를 의식한 일선 공무원의 소극행정이 체감 규제를 높이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규제를 없앨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금이 싫다고 세금을 안 낼 수 없는 것처럼 규제를 아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좋은 세금이 ‘최소 부담·최대 세수 확보’이듯, 규제도 최소 부담으로 정책 목표를 달성해야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기준과 절차가 모호해 규제 집행자에게 과도한 재량권을 주는 규제, 비현실적인 규제, 특정 집단을 보호하는 규제, 경쟁 제한적 규제 등이 나쁜 규제입니다. 기준과 절차가 너무 엄격하니 기업은 규제를 우회하거나 아예 준수하지 않습니다. 최저임금 제도도 준수율 차원에서 보자면 비현실적인 규제입니다.”
▷보수·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규제개혁을 약속했습니다.
“규제개혁은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 때부터 30년 넘게 예외 없이 추진된 중요 국정과제입니다.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규제개혁을 외쳤습니다. 그 결과로 구축된 규제 심사 시스템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도 높이 평가합니다.”
▷노력에도 개혁 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의 기업 환경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수한 시스템을 두고도 성과가 안 나는 것은 시스템이 불량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을 부실하게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규제가 신산업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로톡, 삼쩜삼과 같은 법률·세무 서비스와 비대면 의료, 프롭테크(부동산 스타트업), 숙박 등 5대 분야에서 플랫폼 이코노미가 크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직능단체의 반대에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이익집단이 목소리를 내는 건 민주사회의 정당한 권리지만, 정치세력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려는 시도는 부도덕합니다.”
▷반드시 개혁해야 할 규제가 있습니까.
“개인정보보호법입니다. 한국은 개인정보를 과보호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는 21세기의 석유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자산입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모두 데이터를 먹고 크는 기술입니다. 개인정보보호도 중요하지만, 데이터 활용 역시 중요한 정책 과제입니다.”
▷혁신 창업가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AI 등 첨단 산업 분야는 현재 글로벌 차원에서 확립된 규제가 없습니다. 창업가들은 이런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히려 혁신에 장애가 있다고 느낍니다. 불확실성은 신기술 투자의 최대 장애물입니다. 이런 분야는 기준을 확실하고 조속하게 마련해줘야 혁신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맨큐의 경제학> 공동번역 유명
김 전 위원장은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홍익대 경영대 교수를 지냈다. 2007년부터 2년간 한국경제연구원장을 맡았다. 그의 첫 직장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규제 완화에 대한 학계 의견을 관료들에게 전달한 것이 그를 ‘규제 전문가’로 이끈 계기가 됐다.
그는 1998년 초판을 낸 <맨큐의 경제학> 번역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의 책을 프린스턴대 동문이자 매제인 김경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와 공동 번역해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2015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장을 맡아 정치에 입문했다. 이어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다. 정책 전문성을 인정받아 정무위원회 여당 측 간사를 맡는 등 주목을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의 규제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국회의원 당시 당론을 어기고 규제개혁론자의 소신을 지킨 것도 주목받았다. 2020년 3월 ‘타다 금지법’으로 불리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당시 반대한 국회의원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시 4년간 의원 생활 중 당론에 반대한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며 “다시 돌아간다면 여전히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 약력
△1955년 서울 출생
△1978년 서울대 경제학부 졸업
△1984년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 석·박사
△1988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1991~2016년 홍익대 경영대학 교수
△2004년 한국규제학회장
△2007년 한국경제연구원장
△2015년 여의도연구원장
△2016~2020년 제20대 국회의원
△2021년 한국뉴욕주립대학교 석좌교수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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