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청와대 경제·금융상황점검회의(서별관 회의) 불참은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다. 글로벌 경기 회복 지연으로 수출이 둔화하고 내수도 얼어붙을 때였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정부·청와대 인사들은 금리 인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는 “중요한 시기에 중앙은행 총재는 중앙은행에 있어야 한다”며 회의에 빠졌다. 그 다음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는 6개월 연속 동결을 결정했다. 한 달 뒤 금리를 내렸지만 기자간담회에서는 “통화정책 결정은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정부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난달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3.5%로 동결했다. 작년 2월부터 13회 연속 동결이며 횟수와 기간에서 최장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내수 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금통위의 고유 권한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한은이 뭐 하고 있냐’는 불만 섞인 말이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금리 인하 환경이 조성돼 있다”며 군불을 지펴온 터라 더욱 그렇다. 다음날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 논란에는 “오히려 독립성이 있으니까 결정이 나오고 나서 뒤늦게 아쉽다는 입장 표명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은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목적으로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한다고 법에 명시하고 있다. 경기 둔화 조짐에도 금리를 내릴 수 없었던 건 부동산시장 과열로 인한 금융 불안 우려 때문이란 해석이 많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23주 연속 상승했다. 5대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은 지난달에만 8조8700억원 급증했다. 두 달 연속 월간 최대 증가폭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은 정부와 금융당국에 있다. 아파트 공급 대책은 신뢰를 얻지 못했고 불안한 국민은 부랴부랴 ‘영끌’에 나섰다. 무주택자를 위한 디딤돌대출, 버팀목대출 등 저금리 정책상품은 ‘빚내서 집 사라’고 부채질했다.
과거에도 한은과 정부·정치권은 통화정책을 놓고 이따금 충돌했다. 기재부가 주로 “인하하라”고 선제공격했다. 고환율 정책 신봉자인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이 2008년 그랬고 2015년 최경환 전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홍남기 당시 장관이 금리를 내리라고 한은을 압박했다. 강 전 장관은 최근 인터뷰에서 “금리 결정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며 “금통위에 권한을 위임했지만 한은법 92조2항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규정했다”고 했다. 악법도 법이니 따라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조항은 중앙은행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한은법 개정 얘기가 나올 때마다 1순위로 거론되는 조항 중 하나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생 책 <선택할 자유>에서도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정치적 목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막는 최고의 보호 수단이다’라고 적고 있다.
정부는 불필요한 입장 표명으로 독립성 침해 논란을 자초하기에 앞서 부동산시장 과열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무언의 압력은 없다. 대통령실 발언이 훗날 혹시나 있을 경기 침체의 책임을 한은에 떠넘기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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