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만 한 붓끝이 화면을 지나며 춤추는 사람들이 됐다. 화면 뒤로 보이는 또 다른 군상들. 외로이 서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화면 밖으로 걸어나가자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이 다시 여백의 공간에 나타났다.
수묵 추상의 거장 산정 서세옥 화백(1929~2020)의 작품 7점이 지난 4일 개막한 ‘프리즈 서울’에서 LG 투명 올레드 TV로 다시 태어난 장면이다. 그의 장남이자 세계적 설치미술가 서도호(62)와 건축가 서을호(60)가 아버지의 작품을 재해석했다. LG 투명 올레드 TV는 올해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선보인 후 국내엔 처음 공개됐다. 무한대에 가까운 명암비가 수묵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 최첨단 기술을 만나 섬세하게 담겼다는 평가를 받으며 프리즈 서울 기간 내내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8대의 투명 올레드 TV에 ‘즐거운 비’(1976) ‘행인(行人)’(1978) ‘사람들’(1996) 등 7점의 작품이 깊은 블랙부터 옅은 먹색으로 다채롭게 펼쳐졌다. 평면 회화인 원작을 짧은 애니메이션 형태의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해 살아있는 그림이 됐다. 투명 올레드 TV와 올레드 에보가 겹쳐 재생되는 영상은 전체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입체감을 부여했다. 서도호 작가는 “수천년간 볼 수 없던 그림의 뒷면을 볼 수 있었다”며 “투명 올레드 TV가 구현하는 기술을 본 뒤 천지개벽하는 것 같았다”고 이번 작업의 계기를 설명했다.
서을호 건축가는 이번 전시의 공간 연출을 맡았다. 전시장 입구부터 뒤편까지 한눈에 투과해 볼 수 있도록 작품을 겹겹이 배치해 마치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구성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은 입구에 있는 반투명 설치 작품부터 그 뒤로 나란히 놓인 8대의 투명 올레드 TV와 8대의 올레드 에보로 구성한 미디어아트 작품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전시장 뒤편에서는 올레드 사이니지 24대로 구성된 대형 미디어월에 서세옥 화백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 전시장 벽면에는 원작 7점도 전시됐다. 개막일 전시장을 찾은 마이클 고반 LA현대미술관(LACMA) 관장은 “최첨단 기술이 위대한 예술과 만났을 때 어떤 새로운 관점이 탄생하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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