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준비 중인 영숙씨는 책 모으기가 취미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생겼다. 새로 살 집에 현재 쓰고 있는 책장을 가져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기존의 책장은 처분해야 하고, 책만 가져갈 수 있다. 이사 후 다시 책장을 구입할 생각을 하니 귀찮다. ‘그냥 이사하지 말까?’
영숙씨의 상황은 퇴직연금 계좌를 타사로 옮길 때 가입자가 처하게 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현재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혹은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를 타사로 옮기려면 계좌 안에 있던 펀드, 예금 등의 상품을 모두 팔고 현금화해야만 옮길 수 있다. 이때 만기가 안 된 예금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중도해지에 따른 이자 손실이 따른다. 새 계좌로 옮기고 나면 다시 상품을 골라서 포트폴리오를 짜야 한다. 이렇게 상품 해지와 재가입의 번거로움이 있다 보니 기존에 계좌를 두고 있던 회사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게 가입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수고로운 절차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연금계좌 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가장 큰 이유는 수익률 때문이다. DC형 퇴직연금과 IRP는 가입자가 어떤 상품을 고르고 어떻게 운용했느냐에 따라 수익률이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퇴직연금 운용에 보다 도움이 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갖춘 금융회사로 계좌를 옮기고자 하는 동기가 큰 것이다.
오는 10월이 되면 퇴직연금 계좌 이전 부담이 좀 덜어질 예정이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실물’이란 펀드와 예금 같은 금융상품을 뜻한다. 말 그대로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도, 타사 계좌로 옮길 수 있게 된다. 동일 유형의 퇴직연금제도, 즉, DC형에서 DC형으로, IRP에서 IRP계좌로 실물이전이 가능해진다.
다만 모든 상품이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펀드, 상장지수펀드(ETF), 예금처럼 이전이 가능한 상품도 있지만 리츠, 머니마켓펀드(MMF), 주가연계증권(ELS)처럼 이전이 불가능한 상품도 있다.
디폴트옵션 상품 역시 이전이 안 된다. 이전이 안 되는 상품은 가입자가 스스로 현금화를 한 뒤 이전 신청을 하면 된다. 내가 보유한 상품이 이전 가능한지에 대한 확인은 금융회사의 고객센터에 직접 문의하는 방법도 있고, 제도 시행과 발맞춰 금융회사 홈페이지에 열릴 조회서비스를 통해 간편하게 확인하는 방법도 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를 이용해 퇴직연금 계좌를 옮기고 싶다면 확인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상품을 옮길 회사가 취급하고 있는지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만일 옮길 회사의 퇴직연금 상품 라인업에 내가 가진 상품이 없다면 실물이전이 불가능하다. 가급적 다양한 상품을 구비한 회사를 고르는 것이 좋은 이유다. 기존 회사에는 없던 상품을 퇴직연금 포트폴리오에 편입하고 싶어서 계좌를 옮기는 경우도 이전할 회사의 상품 라인업을 꼼꼼히 파악해 보는 게 좋다. 퇴직연금 투자가 처음이라면 금융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콘텐츠도 살펴보자. 운용할 때 인공지능(AI)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로보어드바이저’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 투자상품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는 콘텐츠를 풍부하게 제공하는지도 확인해볼 부분이다.
연금개혁이 화두인 시대, 퇴직연금 수익률 관리는 개인의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공적연금만으로는 부족한 노후의 경제적 재원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느냐는 개인이 퇴직연금을 얼마나 키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직연금 가입자라면 이번 실물이전 제도 시행을 계기로 내 퇴직연금을 어디에서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오현민 수석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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