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정경화…76세 바이올리니스트가 보여준 '거장의 자격'

입력 2024-09-08 17:21   수정 2024-09-09 05:30



세계 곳곳에서 흠결 없는 기교, 혈기 넘치는 에너지로 시선을 휘어잡는 신성(新星)은 매년 쏟아져나와도, 거장(巨匠) 반열에 오르는 음악가는 많지 않다. 단순히 손가락만 잘 돌아가는 기술자가 아닌 악보 너머 작곡가의 의중을 읽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음 하나로도 전율을 일으킬 줄 아는 예술가만이 얻을 수 있는 명패라서다.

유럽인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1967년 세계 최고 권위의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이스라엘 출신 명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차지하고, 베를린 필하모닉·런던 심포니 같은 명문 악단들과 협연하며 세계무대를 장악한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76) 같은 연주자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인 셈이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정경화의 리사이틀은 예상대로 성황이었다. 자신의 몸집만 한 바이올린 케이스를 둘러맨 초등학생부터 그의 오래된 음반을 들고 자리에 앉은 노부부까지. 각양각색의 청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미소 지은 정경화는 잠시 숨을 고르곤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그가 들려준 첫 작품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장엄하면서도 강렬한 악상이 이어지는 이 작품에선 바이올리니스트의 호흡이 빨라지거나 과장된 표현이 생겨나는 일이 빈번한데, 정경화는 전체를 관통하는 긴 호흡을 한시도 잃어버리지 않고 각 선율의 끝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격조 높은 브람스를 들려줬다.

연주 초반엔 몸의 근육이 덜 풀린 탓인지 음정이 흔들리거나 현에 가하는 장력이 약해지는 구간이 더러 들리긴 했지만,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거장다운 해석을 보여줬다.

2악장에선 활 전체를 넓게 사용하면서 폭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서정을 자아냈고, 3악장에선 섬세하게 밀도를 조율하다가도 돌연 무게감 있는 터치로 뼈대가 되는 음을 명료히 강조하면서 브람스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명징하게 드러냈다. 고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4악장에선 고음과 저음, 장음과 단음, 연결과 단절 등의 대비를 강조하면서 대단한 추동력을 불러냈다.

다음 곡은 브람스 베토벤과 함께 ‘세계 3대 바이올린 소나타’로 꼽히는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정경화의 프랑크는 사색적이면서도 우아했다. 그는 비브라토, 보잉의 폭과 속도를 하나하나 치밀하게 계산해 연주하기보단 자신이 이해한 작품의 어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며 프랑크 고유의 몽환적인 악상을 생생하게 펼쳐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연주 내내 바이올린과 수직을 이루도록 활을 곧게 밀고 당기며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음질, 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컨트롤이 쉽지 않은 활의 끝부분에서 만들어내는 간드러진 음색 등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지내온 그의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3악장에선 음 하나하나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면서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저음으로 파고들면서 불러내는 깊고도 묵직한 울림과 고음으로 솟구치면서 만들어내는 처연한 독백, 그 두 영역을 연결하는 첨예한 감정 표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윤슬처럼 찬란한 음색으로 마지막 악장의 연주를 시작한 정경화는 시종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콘서트홀 천장까지 아우르는 입체적인 음향을 펼쳐냈다. 정확한 리듬 표현과 장대한 활 움직임으로 응축된 음악적 표현을 서서히 증폭시키며 만들어내는 불꽃 같은 에너지는 여러모로 차원이 달랐다.

이날 함께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다소 무난한 연주를 보여주는 데 그쳤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모든 걸 맞추겠다는 듯 악상의 변화 폭과 세밀한 뉘앙스를 조율하면서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했는데,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과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가 피아노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장악력과 집중력이 부족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의 음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격렬하게 대립, 조화를 이루며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해야 하는 순간까지도 제한적인 음량과 평면적인 표현에 머무르면서 밋밋하단 인상을 남겼다.

이날 일흔여섯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숨이 차고,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팔을 뻗으며 음악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들려줬다. 그가 40년 넘게 ‘거장(巨匠)’의 반열에서 내려오지 않는 건 아마 그 뜨거움 때문이 아닐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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