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국회 소통관. 육군 대장 출신 재선 의원인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최고위원이 기자들을 보더니 겸연쩍은 듯 웃었다. 다른 야당 국방위원회 의원들과 함께 ‘계엄 음모설’에 대한 브리핑을 마친 직후였다. 이들은 ‘김용현 국방부 장관이 경호처장 시절 방첩사령관과 수도방위사령관, 특수전사령관을 서울 한남동 공관으로 부른 건 계엄 모의를 위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가져온 격려 모임”이라는 김 장관의 해명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때아닌 계엄 준비설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조차 “계엄 음모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당내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분위기다. 브리핑 전날까지 정성호(5선) 안규백(5선) 진성준(3선) 박주민(3선) 의원 등 당 중진 의원들도 “계엄과 관련된 구체적인 제보를 듣지 못했다”고 해 더 힘이 빠졌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친야 유튜버들 사이에서나 돌던 계엄 음모설을 중앙 정치무대로 끌고 나온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민주당은 과거 음모론으로 강력한 장외 집회를 끌어내 국면 전환에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민주당의 음모론에는 언제나 호소할 대상과 함께 전략적 목표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광우병 괴담’은 중산층을 상대로 이명박 정부의 조기 레임덕을, ‘세월호 외력 침몰설’은 범야권 지지자를 대상으로 박근혜 정권 퇴진을 목표로 제기됐다”며 “민주당이 제기한 음모론은 다음 목표를 위한 명분 쌓기라는 점이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고 말했다.
특히 민주당은 음모론을 대규모 장외집회로 연결지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언제든 반정부 집회에 나올 준비가 돼 있는 친야 성향의 시민단체 및 노조와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장외집회에 앞장선다. 민주당 의원들은 ‘사드 전자파 괴담’ 때 경북 성주까지 달려가 “전자파에 몸이 튀겨진다”는 ‘괴담송’을 불렀다. 지난해 ‘후쿠시마 처리수 괴담’ 당시에는 이 대표가 당원을 동원한 주말 장외집회를 주도하더니 급기야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음모론의 정치적 효과를 연구해온 벨기에아카데미의 크리스 벨롯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음모론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서사가 되며, 거리에서 군중을 이끄는 힘이 된다”며 “이를 통해 정치가들은 정적을 상대하는 힘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콰심 카삼 영국 워릭대 철학과 교수는 “음모론은 사람들이 불행을 자신의 반대 진영 탓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을 준다”며 “여기서 정상적인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처하는 사회 환경으로 몰고 간다”고 말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제기된 ‘부정선거 음모론’은 선거 패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양당 지지자들의 감정을 파고들었다. 2012년 대선 패배가 납득되지 않았던 민주당 지지자들은 개표기 조작설을 유포하는 영화 제작에 돈을 냈고, 2020년 총선 참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투표용지 조작을 주장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양쪽 다 “상대 쪽은 선거 승리를 위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단까지 동원할 정도로 타락했다”는 믿음을 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은 물론 2020년 총선과 관련해서도 개표 조작을 의심할 만한 명확한 증언이나 물증은 나오지 않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켜 유포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전부를 위태롭게 했을 뿐이다.
주류 정당의 이념적 차이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도 정치인들이 괴담 정치의 유혹에 쉽게 빠질 것으로 보는 이유다. 정책만으로는 상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힘든 상황에서 음모론을 통해 지지자를 결집하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민주당 보좌관은 “양당 모두 경제가 최대 관심사인 중도층 공략에 나서면서 대북 정책을 제외하고는 큰 틀에서 정책적 차이가 크게 줄었다”며 “음모론을 동원해서라도 상대가 얼마나 나쁜지 부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음모론을 극복하는 해법은 사회적 성숙도를 높이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음모론은 집단지성을 통한 자정 능력을 높여야 해결 가능하다”며 “계엄 음모론이 먹히지 않는 것은 한국의 중산층이 그만큼 두터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음모론을 퍼뜨리는 정치인과 유튜버 등에 대해서는 선거와 시장을 통해 심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경목/배성수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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