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타이 아티스트' 티라바닛이 리움 지하에 세운 '미로의 대저택'

입력 2024-09-26 15:52   수정 2024-10-24 17:42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저택에선 잠깐 한눈을 팔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복도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작은 방들은 방금 들어온 곳이 어디였는지, 나가는 문은 어디 있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이 '미로 저택'이 들어선 곳은 다름아닌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2년마다 관객을 찾아오는 리움 '아트스펙트럼 2024 : 드림 스크린'이 펼쳐지는 곳이다.

2001년 호암갤러리에서 청년작가 서베이 전시로 시작한 아트스펙트럼은 격년마다 신진 작가들을 뽑아 시상식과 전시를 함께 열어주는 리움의 '신진작가 등용문 프로젝트'다. 그런 아트스펙트럼이 올해는 기존의 공식을 깨고 완벽히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국내 미술계를 넘어 아시아에서 주목받는 작가 26팀의 작품 60점을 선보인다. 마치 '리움 비엔날레'같은 모습이다. 한 명을 꼽아 수상하던 '작가상'도 올해는 없앴다. 보다 더 많은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리움에 대저택을 들여놓은 주인공은 태국 작가 리크리트 티라바닛. 1961년생인 그는 1990년 뉴욕 개인전에서 팟타이를 요리해 나눠주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2년 후인 1992년에는 갤러리를 마치 식당처럼 꾸미고 그린 커리와 쌀밥을 무료로 나눔했다. 이후에도 그는 음식 대접을 통해 관객을 자신의 퍼포먼스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관계 맺기' 실험을 지속해 왔다.

'관계 미학의 선두자' 티라바닛이 기획자가 되어 리움을 찾아왔다. 리움의 유지원, 전효경 큐레이터와 합심해 대저택 안으로 관객을 인도하는 전시를 꾸며냈다. 전시가 개막한 바로 다음 날, 리움미술관 지하에 세워진 집에서 그를 만났다.



'드림 스크린'을 주제로 스크린 속 세상에 주목했는데.
"전효경 큐레이터가 우연히 보내 준 글에 영감을 받았다. 밀레니얼 이후 세대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게 된 첫 번째 세대라는 내용이었는데, 많은 진짜 경험들이 스크린을 통해 대체됐단 걸 깨닫게 해줬다. 게임과 영화, 유튜브 등으로 여행도 할 수 있고, 지구 반대편 이야기도 알 수 있지 않나. 거기서 '스크린'의 아이디어가 시작됐다."

스크린과 '공포'를 연결짓는 전시를 펼친다.
"스크린의 등장으로 우리의 경험과 시공간이 뒤틀렸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단순한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 스크린의 존재가 공포스럽게도 느껴졌다. TV나 컴퓨터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공포스러운 집을 꾸미자는 아이디어도 거기서 나왔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한국 미술계에 느낀 감상이 있다면.
"한국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젊은 작가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뉴욕이나 런던에 비해 한국은 기업, 산업계에서 젊은 작가들을 쉽게 지원해주지 못한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정부, 리움과 같은 대형미술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열고 작가들을 후원해준다는 게 흥미로웠다."

리움 아트스펙트럼 2024에서 수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났다.
"콜롬비아에서 가르칠 때 많은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하러 왔다. 초창기엔 한국 작가들이 서구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정형적인 작품'을 많이 내놨다. 하지만 이 전시를 준비하며 만난 작가들은 형식과 공식을 탈피한 작업을 많이 들고 나왔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을 직관하는 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리움의 두 디렉터와 함께 손잡고 기획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나의 치앙마이 집에 같이 갔던 것 아닐까. 전시 초창기에 리서치를 하자며 워크샵을 가장한 휴가를 떠났다. 미얀마, 베트남 등 여러 국가에서 작가들도 같이 왔다. 무려 12명이나 됐었는데, 같이 먹고, 자고, 경험하며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일하자'며 책상에 앉은 것보다 소파에 드러누워 작업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통상적으로 대형 기획전을 만드는 과정과는 많이 다른데.
"실제 우리의 짧은 치앙마이 합숙이 이번 전시 속에 많이 반영돼 있다. 작업에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탄생한 아이디어들이 곳곳에 녹아 있다. 5일 내내 가족처럼 대화하고 편하게 아이디어를 나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엔 작가로 한국을 찾았다. 작가와 디렉터로서의 역할은 많이 다를 것 같다.
"나는 즉흥적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또 내 전시를 통해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게끔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작업의 핵심도 '만남'과 '관계'에 있다. 그래서 작가든 큐레이터든, 어디서도 내 역할은 다르지 않다. 기획자로 특별히 더 즐거운 점이라고 한다면, 나와 다른 세대의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로서의 이력이 기획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도움을 주나.
"나는 작가와 기획자의 역할이 구분돼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작가가 아니라 무언가와 함께 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결과물을 낸다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고 호흡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젊은 작가들을 만나며 동시대 예술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 같다.
"우리가 아트스펙트럼을 중요하다 생각하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다. 이러한 기획전이 신진 작가들의 기반을 다지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에 걸친 작가들은 기성세대보다 지원의 폭이 좁고, 갤러리와 연결되지 않으면 경험의 기회도 적은 게 현실이다. 마침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프리즈 서울과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가 열리는 시기에 함께 전시가 열리면 해외에서 온 관계자들이 작가들을 보지 않겠나. 이 작가들이 모두 이번 전시를 통해 세계로 나갈 수 있었으먼 좋겠다."



아시아 예술계는 어떤가.
"한국뿐만 아니라 과거 아시아 작가들의 예술이 서구의 레퍼런스를 참조했다면 지금 세대는 오히려 그 강박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로드맵이 불분명해진 시대 아닌가. 그만큼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재미있는 네트워킹을 모색할 수 있다. 이번 전시가 그렇다. 동시대 아시아 작가들이 함께하며 서로 네트워킹 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작가들은 언제나 질문해야 한다.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나에게 예술이란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 형식은 그 다음이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다. 먼저 잘 된 작가나, 서양 미술의 형식을 참조하지 말고 '우리의 콘텐츠', '나의 콘텐츠'를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작업을 펼치며 리움에 대해 받은 인상이나 소감은.
"작가 입장에서는 리움이 가진 리소스가 풍부하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리움은 공공기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업 갤러리도 아니지 않나. 국공립 기관은 관료주의에 빠지기 쉽고, 상업 갤러리는 지나치게 이익에 몰두하게 되는 리스크가 있다. '중간지대'에 속한 리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 중 하나가 아트스펙트럼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로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작가로서, 디렉터로서 활동 계획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처럼 오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갈 것이다. 많은 일을 하고 싶다."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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