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가 코로나19 전까지 ‘최소 60억~70억 원 없으면 영화 못 찍는다’고 했던 걸 반성해야 해요.”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점은 2003년이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 걸작들이 이때 쏟아졌다. 100억 원 넘는 제작비를 쏟아부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참패하며 부침을 겪는 중에 나온 성과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들의 제작비가 30억 원대의 ‘중예산 영화’라는 점. 뻔한 흥행 공식을 벗어나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결 사건이나 패륜적인 내용을 영화화하는 ‘기획적 모험’은 대형 투자작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코로나19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한국 영화산업 재도약을 위해 중예산 영화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저예산·독립영화가 다양성을 지키고, 대형 블록버스터가 관객을 끌어모은다면 중예산영화는 상업성은 물론 작품성과 실험성도 갖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년 예산안(정부안)에 ‘중예산영화 제작지원사업’을 끼워 넣은 것도, 영화인들이 “영화계에 희망적인 시그널”이라며 환영 의사를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9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5년 예산 지원 영화업계 토론회’를 열고 극장·제작·배급·투자사 등 영화계 관계자들과 만났다. 내년 영화 분야 지원 방안을 미리 설명하고 업계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다. 문체부는 앞서 내년 영화 관련 예산을 올해보다 92억 원(12.5%) 늘린 829억 원으로 편성하고, 이 중 100억 원을 중예산 상업영화 제작지원에 쓰겠다고 밝혔다.
영화계 안팎에서 진단하는 현재 한국 영화의 문제점은 ‘흥행 양극화’와 ‘투자 쏠림’이다. 영화계에 따르면 코로나19에 따른 자본경색으로 현재 촬영 중인 영화는 10여 편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는 고예산 대형 상업영화에 투자가 편중되고 있다. 올해 ‘파묘’, ‘범죄도시4’ 등 천만 돌파 영화가 두 편이나 나왔지만, 영화산업 전반에 불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초청작인 영화 ‘잠’을 제작한 김태완 루이스픽쳐스 대표는 “3년간 팬데믹 겪으며 업계 전체가 경력 단절을 겪었다”며 “신인 감독이 역량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그 후유증이 여전하다”고 말했다.
김재중 무비락 대표는 “내년에 극장에 걸 영화가 부족할 정도”라며 “새로운 콘텐츠가 없으면 관객들의 극장 유입이 더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병환 롯데컬처웍스 대표도 “지금 구조라면 영화 밸류체인 이해당사자가 공멸한다”며 “산업적 관점에서 시장에 (작품) 공급량이 유의미하게 증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 장관은 “한국 영화가 연간 140편 정도 제작됐는데, 요즘엔 예전만큼 (민간)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면서 “정부도 예산지원을 시작으로 현장 의견을 반영해 지원 방식을 개선하고 실제 산업적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적극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40~50억 원대 예산의 중규모 영화 제작을 활성화해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겠단 것이다.
이에 대해 이규만 한국영화감독조합 이사는 “중예산영화가 갖는 의미가 크다”며 “규모가 큰 영화와 달리 중형 사이즈 작품은 투자자도 작품성에 욕심내고, 감독들도 더 도전적이다”라고 했다. 김봉서 엠픽쳐스 대표는 “요즘 호주 중예산영화들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면서 “지난해 개봉한 ‘토크 투 미’는 45억 원의 예산이 들었는데, 호주의 영화진흥기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후 영화제에 나가 배급이 성사돼 1억 달러의 수익을 거뒀다”고 말했다.
다만 영화계 관계자들은 중예산영화 지원이 일회성에 그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규만 이사는 “감독들이 올해 지원 받지 못해도 ‘언젠가 기회가 오겠구나’라며 장기전 비전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용석 메가박스 대표는 “영화 제작은 돈이 먼저 나간 후 나중에 수익을 거두는 구조라 제작 단계마다 유동성이 필요하다”면서 “일정 예산을 초기에 빠르게 지원해주는 등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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