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관의 딜 막전막후] 시장 규제가 빚어낸 '꼼수 합병'

입력 2024-09-10 17:24   수정 2024-09-11 08:57

마켓인사이트 9월 10일 오후 2시 34분

한국에선 상장 기업을 합병할 때 합병가액을 산정하는 기준을 법으로 정해준다. 주식 가치를 기준으로 하되 주식 가치가 자산 가치보다 낮을 땐 자산 가치를 기준으로 택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있다. 미국과 영국, 독일, 일본 등 자본시장 선진국에는 이런 법이 없다. 합병가액 산정 방식을 자율에 맡긴다.

한국에만 이런 법이 생긴 건 주주 보호를 위한 목적이다. 합병을 추진하는 대주주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합병가액을 산정하는 걸 막기 위해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주가를 기준으로 삼도록 법으로 강제했다. 문제는 이 법이 되레 대주주의 ‘꼼수 합병’을 돕고 있다는 점이다. 주가가 시장 참여자 전원이 동의한 가격이긴 하지만 늘 정답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최근 논란이 된 두산그룹의 합병 문제도 여기서 시작됐다. 주가가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두산로보틱스와 반대로 저평가된 두산밥캣을 주식 가치 기준으로 합병과 주식 교환을 추진하다 보니 두산밥캣 주주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두산그룹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금융당국까지 나선 끝에 기존 합병 계획을 포기했다.
'꼼수 합병'은 곳곳에서 여전
두산그룹이 추진한 합병은 시장의 관심을 받으며 제동이 걸렸지만 비슷한 시기 조용히 숨어 합병을 통한 지배구조 개편을 마무리한 곳도 있다. 코스닥 상장사 엠에스오토텍은 두산그룹보다 더 노골적으로 주식 가치 기준 합병 방식을 이용해 대주주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했다. 엠에스오토텍의 주식 가치가 자산 가치보다 낮은 상황에 주가를 기준으로 합병가액을 산정한 뒤 사실상 대주주의 가족회사인 비상장사 심원과 합병해 대주주의 지배력을 대폭 확대했다.

엠에스오토텍의 일부 소액주주는 대주주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합병 방식이라며 분개했지만 시장에선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소액주주 결집에도 엠에스오토텍은 지난달 대주주 지배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 개편을 마쳤다. 합병 계획을 공시한 이후 지금까지 엠에스오토텍 주가는 약 25% 하락했다.
자율에 맡기되 공시 강화해야
두산그룹의 합병은 여론이 들끓자 이례적으로 금융감독원이 나서서 제동을 걸었지만 이런 방식은 옳지 않다. 어찌 됐든 합법적인 사업 재편 작업에 금융당국이 개입하는 건 월권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업이 추진하는 모든 합병에 금감원이 나설 수도 없다. 상장 기업이 합병을 추진할 때마다 끊이지 않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선 합병가액 산정 기준을 손봐야 한다. 주가 기준 방식은 도입 취지와 다르게 주주를 보호하긴커녕 대주주의 꼼수를 유도하고, ‘법대로 했으니 문제없다’는 면죄부를 주고 있다.

법으로 정한 합병가액 산정 기준을 없애고 미국 등 다른 자본시장 선진국처럼 자율에 맡기는 게 맞는 방향이다. 자율에 맡기되 공시 의무를 대폭 강화하는 견제책도 함께 도입해야 한다. 합병 전 제출하는 현행 증권신고서는 소액주주들이 합병안의 공정성을 파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은 합병가액 산정 방식을 자율에 맡기되 합병의 배경과 경과, 합병가액의 적정성을 포함한 합병의 긍정·부정적 요인 관련 이사회 의견, 합병에 대한 임원의 이해관계, 외부 전문가의 의견 등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합병에 따라 소멸하는 회사의 주주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조치한 내용도 공시하게 한다. 기업이 스스로 공정한 방식을 찾고,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 등을 설득하게 하는 방식이다.

명문화된 법과 규제가 겉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경우가 적지 않다. 두산그룹 사태를 틈타 국회에선 법을 개정해 관련 규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규제에서 비롯된 문제를 또 다른 규제로 해결하겠다는 규제 만능주의는 위험한 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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