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일까, 아니면 유령일까. 하얀 앞치마를 두른 어린 소녀들이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지우개로 쓱쓱 문지른 듯 얇은 물감칠로 그어진 표정은 하나 같이 흐릿하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개인의 자아를 상실하고, 집단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얘기다. 이 그림은 마를렌 뒤마의 ‘교복 입은 천사들(Angels in Uniform)’. 수녀원이었던 ‘스텔리네(Steline·작은 별)’라는 이름의 고아원에 살게 된 가엾은 어린이들의 초상이다. 뭉개진 얼굴에선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듯 하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의 끝에 어딘가 모를 불안이 걸려 있는 이유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뒤마는 유럽 현대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다. 여성, 아이, 혹은 억압받는 인간 군상의 표정을 캔버스에 담아낸 뒤마는 살아있는 여성 작가 중 가장 비싼 값에 작품이 거래된 작가로도 유명하다.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뒤마의 회화를 서울 청담동 송은 전시장에서 만났다.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는 ‘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 전시에서다.
‘피노 컬렉션’이 서울에 온 건 2011년이 처음이다. ‘Agony and Ecstasy(고통과 환희)’라는 제목으로 데미안 허스트와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자신이 소장한 거장의 작품 20여 점을 아시아 최초로 선보였고, 미술에 대한 열기가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13년 전에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들과 함께 방한한 자리에서 “미술은 세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각예술”이라고 강조한 피노는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고도 밝히며 단색화의 부상을 점치기도 했다.
피노 컬렉션은 관람객과 만날 장소로 이번에도 송은을 선택했다. 건축도 온전한 예술로 보는 피노의 컬렉션 철학을 오롯하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송은이라는 것. 송은의 전시공간은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탄 스위스 건축 듀오 자크 헤르조그, 피에르 드 뫼롱의 설계로 지어졌다. 피노 컬렉션 측은 “이 건물이 전시에 딱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미리암 칸, 라이언 갠더, 안리 살라, 피터 도이그 등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 60점이 걸렸다. 회화뿐 아니라 비디오, 설치,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울렀는데, 전시 주제는 ‘인간, 그리고 세계의 초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캐롤라인 부르주아 피노 컬렉션 수석큐레이터는 “피노는 자신의 컬렉션 특징을 ‘다원성’에 두고 있다”며 “하나의 경향성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것이 공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초상’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뤼크 튀망의 ‘중간 휴식’은 팬데믹이 번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난다. 연극 도중의 휴식 시간 같은 텅 빈 무대를 그린 작품으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지난해 KIAF 갤러리현대 부스에 포르쉐를 가져다 놓은 작품으로 이목을 끈 갠더의 설치작품인 ‘쥐’ 연작 중 하나도 보인다. 부르주아 수석큐레이터는 “흰색, 갈색, 검은색 쥐가 미래를 염려하는데, (전시에 나온) 검은 쥐는 정치적으로 암울하다는 말을 계속한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 컬렉터의 안목을 공유하는 것도 묘미다. 잘 알려진 작품만 놓인 게 아니기 때문. 베트남 전쟁 직후 유럽으로 이주한 ‘보트 피플’ 얀 보의 설치작품은 청동기 시대 도끼날, 15세기 중반 성모자상, 20세기 유리 진열장 등 다른 시간대의 재료를 인위적으로 합쳐 덧없는 시간성을 말한다. 선명한 노란색 바탕에 혼종의 생명체가 몸을 뒤트는 기괴한 장면을 담아낸 폴 타부레는 아직 미술대학에 다니는 학생 신분으로 피노의 컬렉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부르주아 수석큐레이터는 “피노는 무명의 젊은 작가라도 예술가로서 멀리 나아갈 것인지 순식간에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고 귀띔했다. 전시는 오는 11월 23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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