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 사는 가장 큰 기쁨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BBC 프롬스를 경험할 수 있는 거요.”
15년 전 클래식 담당 기자 시절, 유럽의 클래식 공연 열기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 BBC 프롬스와 만났다. 한여름, 런던의 쨍한 햇살과 단돈 8파운드(약 1만4000원)로 즐길 수 있는 세계적인 클래식 축제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영국에 가면 프롬스라는 축제가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돼. 사람들이 서서 클래식 공연을 보고, 앉아서 와인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다니까. 관객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해. 록 페스티벌 같아.”
어쩌다 보니 15년 후에 가족과 함께 런던에 살게 됐다. 마침 프롬스가 열리는 로열앨버트홀 근처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지. 2024년 런던의 여름도 프롬스의 낮과 밤의 기억으로 채색되고 있다.
BBC 프롬스는 이런 정신에 기반하는 축제다. ‘프롬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s)’의 줄임말로 ‘산책하듯 공연장을 찾아 음악을 즐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드레스코드 맞춰 입고 각 잡고 오는 공연이 아니라 누구든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러 오라는 의미다. 1895년 시작돼 130년을 이어왔다. 매년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런던의 로열앨버트홀에서 매일 개최된다. 올해 프롬스는 7월 19일 개막 공연을 시작으로 9월 14일까지 열린다. 공연마다 숫자를 붙이는데, 개막 공연은 prom 1, 폐막 공연은 prom 73이다.
축제 취지에 맞게 티켓값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스탠딩 티켓은 무조건 8파운드. 무대 앞 아레나와 꼭대기 층의 갤러리 중 고를 수 있다. 개·폐막 공연을 제외하면 좌석도 최대 80파운드를 넘지 않는다. 올해 프롬스에서 공연을 10회 관람했는데, 베를린 필(70파운드), 임윤찬(46파운드), 그 외는 모두 스탠딩(8파운드)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10회 공연에 180파운드(약 31만원)를 쓴 셈이니, 상상 초월의 가성비 높은 경험이다.
거장들은 수준 높은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올해 프롬스에서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브루크너 교향곡 5번, 래틀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브루크너 교향곡 4번과 말러 교향곡 6번을 택했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닌 관객에겐 난해할 수 있는 곡들이지만, 거장들은 관객을 믿고 무대 수준을 끌어올린다. 대중에게 익숙한 곡들로 신규 관객을 유입하면서 전통적인 애호가들의 눈높이에도 맞추는 전략이다.
8월 31일, 9월 1일 양일간 열린 베를린 필의 무대는 프롬스의 위상을 제대로 뽐낸 공연이었다. 첫날 베를린 필과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비킹쿠르 올라프손이 합을 맞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관객에게 보내는 따뜻한 러브레터였다. 다음날 베를린 필은 브루크너 교향곡 5번을 선보였는데, 브루크너 특유의 복잡한 전개에도 세계 최고 악단의 내공은 빛을 발했다. 페트렌코는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과 진동만으로도 악단의 사운드를 컨트롤했다.
가디언은 “스튜디오에서 볼륨 1부터 10까지 디지털 기기가 컨트롤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했다”며 “베를린 필 공연은 다시 런던을 세계 최고의 클래식 무대로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텔레그래프도 “이제 그 누구도, 프롬스가 예전처럼 최고를 끌어모으는 능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9월 5일 공연에서 사이먼 래틀은 영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토머스 아데스의 곡 ‘Aquifer’를 영국 초연으로 선보였다. 인터벌에는 래틀이 직접 아데스에게 골드메달을 수여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가 수여하는 이 메달은 클래식 음악계 최고의 영예 중 하나로 브람스, 엘가, 쇼스타코비치 등이 받았다. 래틀은 아데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라며 “우리는 당신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바렌보임과 무터의 조합도 거장들의 파워를 보여줬다. 좌석은 물론 입석까지 전석 매진됐고, 공연 후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로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영국 언론도 임윤찬을 최고의 스타로 조명했다. 가디언은 연달아 2개 리뷰를 내놓으며,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춘 임윤찬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연주를 극찬했다. 통상 뜨거웠던 공연은 리뷰 1개, 평범한 공연은 아예 리뷰가 안 나오는데도 말이다. 가디언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활기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임윤찬의 연주는 불가능할 정도로 섬세한 터치였고, 건반을 통해 결정체처럼 맑은 사운드를 빚어냈다”고 극찬했다.
임윤찬 공연은 올해 프롬스에서 가장 빨리 매진된 공연 중 하나였다. 좌석부터 아레나(1층 스탠딩), 갤러리(5층 스탠딩)까지 전석 매진된 공연으로, 당일 분위기도 매우 뜨거웠다. 다른 공연과 비교해 젊은, 아시아계 관객이 많이 유입된 영향도 있다. 마치 록스타 무대를 보듯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프롬스 조직위원회는 올해 아시아계, 젊은 아티스트를 유독 많이 섭외했다. 개막 공연부터 아시아계 여성 지휘자가 등장했을 정도. 신흥시장으로 떠오르는 아시아, 특히 열광적인 한국의 젊은 관객을 의식한 행보일까. 프롬스 코리아, 프롬스 재팬 등이 기획된 배경과도 연결되는 흐름으로 보인다.
브렉시트와 유럽 내에서 런던 클래식계의 위상이 많이 추락할 것이라고 했지만, 클래식 대중화라는 프롬스의 정신은 여전히 빛났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England is the most class-ridden country under the sun.(영국은 세상에서 가장 계층 의식이 뿌리 깊은 나라다.)”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영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계급화된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프롬스 기간만은, 적어도 로열앨버트홀의 공연장과 바에서는 ‘소셜 믹스’가 활발했다. 갈라지고 찢어진 영국 사회를 끝내 쪼개지지는 않게 하는 예술의 힘이랄까. 한국에서도 올 12월 프롬스 코리아가 열린다. 부디 같은 이름만 붙이는 축제는 아니길.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프롬스의 기본 정신을 이어갈 축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런던=조민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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