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일상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으며 한국 현대무용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 안무가 김보라(42)도 그렇다. 3년 전 난임 시술을 받은 경험으로 신작 ‘내가 물에서 본 것(what I sense in the matter)’을 발표한다. 국립현대무용단원 13명과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다음달 17~19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다.
지난 5일 서울 서초동 연습실에서 미리 만난 김보라의 신작은 과거 그가 사회에 던진 메시지처럼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남겼다. 무용수들은 서로의 몸을 느끼고 어루만지는 것을 넘어 살가죽을 잡아당기고 귀와 코를 들춰 보는 등 무용이라고 부르기에는 ‘낯선 움직임’을 이어갔다.
달걀 한 판을 머리에 이고 중심을 잡으면서 날계란을 깨지지 않게 바닥에 굴리는 여러 무용수 앞에, 한 무용수가 기이한 몸짓으로 무대 위 계란을 빠르게 피하며 뛰어다녔다. 균형과 불균형의 조화가 숨 막히게 다가올 무렵 “이런 건 다 필요 없다”는 식으로 다른 무용수가 튀어나와 날계란 하나를 집어 던져버린다.
연습을 마친 김보라는 “저의 무용은 낯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공연 제목 속 단어 ‘물’은 마시는 물(water)이 아니라 물질(matter)이라는 의미다. 문제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감각을 통해 마주한 물질로서 몸, 거기에서 오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이번 공연의 핵심이다.
“3년 전 시험관 시술을 경험하면서 제 몸이 생경하게 느껴졌어요. 일곱 살 때부터 무용을 해서 내 몸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낯선 느낌이 들었죠. 근원이 무엇인지 파고들고 싶었어요.”
그는 임신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이 아프지 않으면서도 병원에 가야 하는 점, 의사가 경고하는 수많은 부작용의 가능성을 감내해야 했던 점 등이 생각거리를 던져줬다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 여성의 몸은 대체 어디에 위치하는지 궁금해하다가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 수많은 물질(이미 임플란트, 철심, 렌즈 등)로 복잡하게 얽힌 존재라는 것을요. 안무를 구상할 때도 이 복잡성을 보여주기 위해 무용수들과 많이 대화하고 워크숍도 했어요.”
무용수들이 안무가의 경험에 공감했을까? 그는 외려 지지를 얻었다고 했다. “제작진과 무용수 모두 몸을 갖고 있어서요. 모두가 들여다봄직한 보편적 주제라는 점에 깊이 공감해줬어요. 저의 경험은 그저 몸을 탐구하게 된 동기일 뿐이고 안무를 만들어가면서 무용수들이 새롭게 발견하는 몸, 제가 안무가로서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는 몸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번 무대는 무대 바닥을 차가운 스틸로 구성하고, 음악이 아니라 ‘사운드’를 입혀 동작에 의미를 부여한다. “관객은 처음에 객석에서 클래식 음악을 가장 크게 듣는데, 무대 위 무용수는 연습실 잡음, 병원 의료기기 소리를 크게 들어요. 어느 순간에는 그 소리들이 섞여 들어가면서 객석과 무대 간 경계가 서서히 없어지죠.”
이 역시 경험에서 나온 연출이다. 병원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서정적인 클래식 음악이 들렸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마음에는 ‘임신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불안만 가득했다고.
몸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답을 내리긴 어렵겠으나, 관객은 자신의 몸이 하나지만 그것을 단일한 몸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을 거예요. 다중적인 우리 몸을 이해하고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다양한 생각(예를 들면 포스트휴머니즘)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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