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기억될 '27분' 만들어줄래?"…AI 어르고 달랜 미디어 아티스트

입력 2024-09-13 03:03   수정 2024-09-13 03:06


지난 9월 5일 광주비엔날레 국가 파빌리온이 속속 개막한 날, 수많은 예술계 인사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찾은 곳은 따로 있었다. 광주 동구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 테이트모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과 예술감독 및 관계자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시장 안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스 울리히 오브히스트 영국 서펜타인갤러리 예술감독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루 세 차례나 전시장을 찾았다. ‘김아영’이라는 한국 작가의 27분짜리 신작 영상을 시청하기 위해서다.

1979년생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은 역사와 시대에 저항하거나 이탈하는 존재들을 조명하는 작가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호한 상태에 늘 관심을 가졌다. 이런 존재들을 비추며 우리 시대가 직면한 이슈에 대해 메시지를 전한다.

지난해 9월 김아영은 세계 최고 권위 미디어아트 시상식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최고상인 ‘골든 니카’를 품에 안으며 세계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인이 이 상을 받은 건 김아영이 최초다. 이때 선보인 작품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테이트모던에 소장됐다. 최근에는 MoMA에서도 상영회가 열렸다. 이번 신작을 관람하기 위해 해외 인사들이 앞다퉈 전시장을 찾은 이유다.


그는 지난 4월 초대 ‘ACC 미래상’을 수상하며 이번 전시 기회를 얻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 인버스’에 투입된 제작비만 무려 3억원. 김아영은 당당히 1560㎡ 규모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1전시실을 홀로 가득 채웠다. 광활한 전시장 천장에 가로 11m짜리 대형 스크린 3개를 삼각형 구조로 매달았다. 화면마다 재생되는 영상이 조금씩 다르다. 관객이 어디에 자리하느냐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화면 속 세상이 모두 다르다. 관객석에는 의자를 두는 대신 완만한 경사면을 설치했다. 관람객이 앉거나 누워서 또는 서서도 영상을 관람할 수 있게끔 의도했다.

이번 신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은 그를 세상에 알린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후속 작품이다. 주인공과 이들이 딜리버리 댄서라는 회사에서 일하는 배달 기사라는 설정이 동일하다. 지난 작품에서는 가상의 서울을 바탕으로 주인공들이 움직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가상의 세계 ‘노바리아’를 무대로 삼았다. 두 주인공 에른스트 모와 스톰이 우연히 소멸된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을 배달하며 서로 다른 시간관과 세계관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담긴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나침반을 닮은 해시계다. 김아영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영감을 얻은 건 ‘역법’과 ‘시간’. 서구 근대화를 겪으며 사라진 수많은 전통 역법과 시간관을 파고들었다. 그레고리력을 표준으로 사용하며 없어져 버린 각 문화권의 시간과 달력을 매일 공부했다. 그리고 그 역법을 종합해 해시계를 개발했다.

이번 작품은 김아영이 인공지능(AI)과 대화하며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스토리의 절반을 AI가 책임졌다. 시나리오를 미리 짠 뒤 영상을 만들지 않고 AI와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세계관을 실시간으로 설정해 나갔다. 김아영은 이 과정을 회상하며 스스로를 ‘AI 베이비시터’로 칭했다.

영상이 끝나갈 즈음, 모든 스토리가 갑자기 멈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1분30초 동안 화면엔 파열음과 함께 조각 영상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때 등장하는 영상은 모두 김아영이 AI와 함께 작업하며 채택되지 않고 ‘기준 미달’로 버려진 컷들이다. 김아영은 이렇듯 버려진 이미지를 스토리 중간에 폭발시키듯 보여주며 시간의 붕괴, 세계관의 혼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관객은 27분 길이의 작품을 관람하며 마치 미래 세계를 탐험하고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전시는 내년 2월 16일까지.

광주=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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