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우리가 연극을 보는 이유

입력 2024-09-13 16:19   수정 2024-09-14 00:45

해방 이후 이 땅에서는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했다. 그 과정에서 좌우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민간인 희생도 적지 않았다.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은 6·25전쟁 당시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마을을 들쑤시던 당시의 전남 보성 새재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여관집을 운영하는 김삼랑 씨네. 빨갱이 아들은 산으로 들어가 생사를 알 수 없고, 경찰인 처남은 공산당 손에 죽었다. 이 와중에 마을에 유랑극단이 들어온다. 로풍찬 단장이 이끄는 ‘로풍찬 유랑극단’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번안한 ‘노민호와 주인애’를 이 시골에서 공연하려고 한다. 주민들은 이들을 곱지 않게 본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뭔 놈의 연극이냐고.

사실 이 말은 지금도 간혹 듣는다. 2년 전 서울 이태원 참사 이후 각종 공연과 축제가 줄줄이 취소됐다.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를 위해 예술인 스스로 결정한 것도 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일방적으로 중단한 행사도 많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공연이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사람마다 다른 애도 방식이 있는데 ‘슬픔’만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예술은 기분 좋을 때, 등 따습고 배부를 때만 접하는 것이 아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레닌그라드를 900일간 봉쇄했다. 시민 150만 명이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 그 기간에도 레닌그라드의 뮤지컬 코미디 극장은 공연을 계속했다. 어느 날은 ‘삼총사’ 공연을 하던 중 삼총사 배우 중 한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두 명의 총사만으로 공연을 마쳤다고 한다. 포탄이 쏟아지는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표트르 차이콥스키 교향곡을 공연했고 사람들은 빵 대신 공연장 티켓을 샀다.

2017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에서 폭탄 테러로 22명이 죽고 800명이 다쳤다. 2주 뒤 아리아나 그란데는 다시 맨체스터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한 기금 마련 콘서트를 열었다. 티켓은 매진됐고 2만 명의 관객이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다시 로풍찬 극장으로 가보자. 장터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극단 단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민호와 주인애’를 연기한다. 주민들은 그 절절한 로맨스에 빠져들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좌우 따위는 잊은 채 비극의 연인을 보며 눈물짓는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문삼화 연출은 연극을 보는 마을 주민들을 무대 중앙에 배치했다. 극 중 극에서 관객이 관객을 바라보는 것이다.

연극을 보며 함께 웃고 우는 주민들의 표정은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표정이기도 했다. 연극이 끝나고 주민들은 모처럼 밝은 얼굴로 웃고 함께 춤춘다. 그날 그들의 응어리진 마음 위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리라. 가족이 공산당에 몰살당해 복수의 일념으로 죽창을 들고 빨갱이를 죽이러 다니는 피창갑은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주인애에게 묻는다. “어떻게 오빠를 죽인 원수와 결혼할 수 있지?” 주인애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대답한다. “그게 사랑이니까요.”

이 작품은 연극의 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극이란, 예술이란 이렇듯 현실을 잊게 하면서도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진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픽션의 힘이고 연극의 힘이다. 연극이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를 도와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연극은, 예술은 삶을 제대로 살도록 해준다. 그러니 삶이 팍팍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수록 극장으로 가자. 연극을 보자. 이 시대의 로풍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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