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사진)은 최근 고려아연 이사회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잦았다. 30년 동안 고려아연 이사회 멤버로 활동한 장 고문은 1946년생으로 영풍그룹 이사진 가운데 최고령이다. 연배가 훨씬 어린 이사진들에게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장 고문의 분노는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일가와 갈등을 겪은 2022년부터 시작됐다. 최윤범 회장 측 인사로 채워진 이사회에서 장 고문은 '고립무원' 상황이었다. 장 고문 주장이 이사회에서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격분한 장 고문은 MBK파트너스에 고려아연 경영권을 넘기기로 결심한다. 1949년에 영풍그룹을 빚은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파국은 장 고문의 분노에서 비롯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75년 동안 함께 빚은 회사를 외부세력에 넘기는 데 대해선 성급하고 무모했다는 비판도 많다.
장 고문 분노의 수위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도 상당한 대가를 치를 전망이다. MBK·영풍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뒤늦게 방어대책을 물색하고 있다. 하지만 대응카드가 그리 많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1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장 고문은 올해 2~5월에 열린 이사회에 올라온 19개의 안건을 놓고 3개의 안건에 대해서 반대했다. 1건의 안건은 기권했다. 장 고문을 제외한 12명의 이사진은 모두 찬성한 안건이다. 장 고문이 반대한 안건은 고려아연의 배당과 본사를 서울 강남구에서 중구로 이전하는 내용, 정관 변경 등이다. 장 고문은 지난해에도 불편한 안건이 올라오는 이사회에 불참했다.
고려아연의 이사회는 13명으로 구성됐다. 최 회장과 장 고문 외에 사외이사 7명 사내이사와 기타비상무이사 4명 등이 이사회 멤버다. 장 고문을 제외하면 모두 최 회장 측 인사다. 장 고문은 이사회에서 '고립무원'이다.
장 고문이 고려아연에 이사회에 진입한 것은 30년이 넘었다. 고려아연은 1949년 고(故) 최기호·장병희 창업주가 세운 회사다. 고려아연 등 비철금속 계열사는 최윤범 회장을 비롯한 최씨 일가가 맡고 있다. 영풍그룹과 전자 계열사는 장형진 고문 일가가 담당한다. 장씨 가문을 대표해서 장 고문이 고려아연 이사회에 들어온 것이다. 이사회에 몸담는 동안 고려아연에 상당한 애정을 쏟은 것으로 전해진다.
2022년부터 장 고문은 이사회에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이 사업재편에 나선 시점이다. 최 회장이 사업재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화그룹 등을 대상으로 유상증자를 진행했다. 외부 자본을 유치하는 데 대해 장 고문은 크게 반발했다. 영풍그룹 핵심인 고려아연을 최씨 가문이 장악하려는 시도로 본 것이다. 이때부터 양측은 지분경쟁에 나섰고, 주주총회에서도 격돌했다.
격돌 과정에서 고려아연은 영풍그룹의 치부인 석포제련소 환경오염 사태를 들췄다. 영풍이 운영하는 석포제련소는 각종 중금속 배출로 환경오염을 불러왔다는 의혹을 받았다. 장씨 가문은 이 같은 분노의 동력을 바탕으로 고려아연 경영권을 MBK에 넘기는 계약을 체결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부 세력에 회사를 넘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75년 동안 함께 운영한 고려아연 경영을 외부세력에 넘기는 데 대해 성급하고, 무모했다는 지적이 많다.
최윤범 회장도 이 과정에서 영풍의 저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를 만난 김앤장 변호사들과 투자은행(IB) 전문가들은 "최 회장은 재벌가 가운데 가장 혁신적 인물"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미국 변호사로서 근무하면서 IB 시장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가진 만큼 그는 자신만만했다. 제련 사업에서 신재생에너지와 2차전지 소재 사업으로 사업재편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동업을 이어온 장씨 일가를 설득하는 과정이 사려 깊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 현대자동차, LG, 한화 등으로부터 투자유치를 하면서 장씨 가문과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이 같은 관계를 좁히지 못하면서 상당한 비용을 치를 전망이다.
한편 MBK는 장형진 고문 등이 운영하는 영풍이 보유 지분 상당수를 매입해 고려아연 최대주주에 오른다. 동시에 공개매수를 진행해 고려아연 지분을 최대 14.6%를 사들이기로 했다. 영풍이 MBK와 손잡고 최 회장이 경영권을 행사하는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에 나선 것이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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