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난으로 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를 분사하기로 했다.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 사업에 재진출하며 ‘반도체 왕국’ 재건을 노렸지만 투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막대한 적자가 지속됐다. 지난달 발표한 2분기 실적에서는 2조원이 넘는 대규모 적자를 공개하며 구조조정 가능성을 밝혔다.
3년 전 파운드리 사업에 복귀한 인텔은 전 세계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자사 물량 규모를 믿고, 반도체 제조 부문에 의욕적으로 투자했다. 인텔의 CPU만 찍어내도 파운드리 2위 삼성전자에 맞먹는 수주 실적이 쌓이는 데다, 유일한 미국 파운드리라는 강점까지 앞세워 미국 정부의 투자를 등에 업고 파운드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투자 비용이 예상을 뛰어넘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이 인공지능(AI) 시대 반도체 패권이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로 넘어가면서 주력인 CPU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2년간 인텔은 매년 250억 달러(약 33조원)을 투자했지만 별다른 실적은 내지 못했다.
한때 인텔의 파운드리사업부 매각설도 나왔지만, 외신에서는 현재로선 가능성이 크지 앟다고 본다. 인텔 역시 매각설에는 선을 그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투자자들이 인텔에 파운드리를 분리·매각하는 방안을 권장했지만, 그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인텔이 파운드리 자회사를 설립하면 외부 자본을 조달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지난 월요일 장외 거래에서 인텔 주가는 8% 상승했다. 외신에 따르면 인텔은 파운드리 자회사의 기업공개(IPO)도 검토 중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인텔 파운드리 부분을 자회사로 두면 독립적으로 외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데다가 독립성에 대한 고객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며 “각 사업의 재무구조 최적화로 성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고 주주가치도 창출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독일과 폴란드 등에서 짓고 있는 공장 건설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진행 중이던 300억 유로 규모의 프로젝트를 중단하며 1년 만에 프로젝트를 접기로 했다. 지난해 인텔은 1.5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급 공정을 도입해 독일을 인텔의 유럽 첨단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내놨었다.
이밖에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진행 중이던 공장도 약 2년 간 중단한다. 말레이시아 공장에 대한 계획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다만 애리조나, 오레곤, 오하이오 등 미국 내에 건설 중인 신규 반도체 생산 시설은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무실도 연내 3분의 2로 축소할 계획이다. 겔싱어는 WSJ에 “자본 효율성이 높지 않은 소규모팀을 정리하고 중앙 집중화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며 “이는 더 간단하고 효율적이며 운영 속도가 더 빠른 인텔을 구축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앞서 인텔은 직원 15%에 달하는 1만5000명을 감원한다고 밝혔다. 또 2024 회계연도 4분기에는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고 연간 자본 지출도 20% 이상 줄인다고 밝힌 바 있다.
인텔은 AWS용 AI 칩을 비롯한 최첨단 제조 공정을 현재 건설 중인 오하이오 주 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이다.
인텔은 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로부터 30억 달러의 추가 보조금을 따낸 사실도 공개했다. 국방부에 공급할 군사용 반도체 생산을 위한 보조금으로 ‘시큐어 엔클레이브’로 불린다. 인텔은 미국 국방부의 요구에 따라 관련 기술을 개발한 뒤 이같은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를 미국 내에서 생산해 미국 국방부에 공급한다. 이는 인텔이 지난 3월 미국 정부로부터 받기로한 85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과는 별개다.
겔싱어 CEO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잘 실행해야 한다"며 "그래야만 비판자들을 잠재우고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반도체 패권을 쥔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TSMC)칩은 훌륭하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른 업체를 이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AI 칩 수요가 폭증하면서 TSMC만으로 생산을 감당할 수 없자 다른 파운드리를 이용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다. 삼성전자와 인텔만이 초미세 첨단 공정에서 TSMC를 대체할 수 있는 후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최근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 회복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4공장(P4)에 당초 예정됐던 파운드리 대신 D램·낸드 등 메모리 생산라인을 증설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서 고전하는 사이 TSMC는 1인자로서 격차를 벌리고 있다. TSMC는 올 2분기 매출에서 AI 반도체 점유율 52%를 기록하며, 처음 절반을 넘어섰다. 지난해 하반기 가동을 시작한 3나노 공정의 매출 비중도 올해 20%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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