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촌극이 있습니다. 한 기업에 호재가 터지면 이름이 비슷하거나 관계없는 종목의 주가도 널뛰는 현상입니다. 일부 투자자는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두고 '국장(국내 증시)식 매매법'이라며 국내 투자자 수준을 낮잡아 보기도 합니다. 다만 이같은 종목명 착각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증시에서도 종종 발생합니다.
고려아연 분쟁에 영풍그룹株 뛰자…거래·주가 치솟은 영풍제지
2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3일과 19일 영풍제지의 일일 평균거래량은 1985만622주를 기록했습니다. 직전 거래일인 지난 12일(26만205주)에 비해 76배 급증했습니다. 주가도 1200원대에서 1400원대로 껑충 뛰었습니다.주가가 뛰고, 거래량이 폭증할 만한 특별한 호재는 없었습니다. 증권업계에서는 영풍제지를 영풍 그룹사로 오해한 사람들이 대거 영풍제지에 몰린 것이란 해석이 나옵니다.
국내 최대 규모 사모펀드(PEF)를 굴리는 MBK파트너스가 영풍그룹과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에 나서면서 계열사 영풍정밀은 3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지분 1.85%를 보유한 영풍정밀 주식을 주당 2만원에 공개매수하기로 결정한 여파입니다.
이같이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면 대주주가 지분율 경쟁을 위해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입하기에 관련 기업 주가가 상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풍제지는 영풍, 영풍정밀과 달리 '영풍' 그룹사가 아닙니다. 영풍제지가 관계사가 아니라는 소식이 퍼지며 전날 해당 기업 주가는 4.91% 내리며 상승분을 일부 반납했습니다.
이름이 비슷해 착각하고 투자하는 일은 종종 발생합니다. 작년 말 대동은 포스코와 첫 공급계약 소식을 전했는데, 이름만 비슷한 대동전자, 대동스틸에도 매수세가 몰렸습니다. 지난해 11월 에코프로머티리얼즈가 상장했을 때도 이름이 비슷한 BGF에코머티리얼즈의 거래량이 폭증하고, 주가가 급등하는 해프닝이 발생했습니다. 그 외 금양-금양그린파워, 신풍제약-신풍제지, 한미반도체-한미약품, 펩트론-펨트론, 오리엔트정공-오리엔탈정공도 서로 종목명만 비슷할 뿐 관계가 없는 회사입니다.
한국거래소는 종목명을 제한할 규정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일례로 2007년 임플란트 업체 오스템(OSSTEM)은 먼저 상장한 자동차 부품업체 오스템(AUSTEM)과 한국어 이름이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임플란트 업체 오스템은 사명과 종목명을 오스템임플란트로 바꿨습니다. 이처럼 100% 이름이 같은 상황만 아니면 종목명을 정하는 건 회사의 자유입니다.
"'종목명 혼동' 현상은 미국에서도 종종 벌어져"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투자자들은 "국장 수준 처참하다", "이게 국장식 매매법"이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곤 합니다. 다만 이런 일은 일부 투자자의 주장처럼 '수준 낮은' 증시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뿌리가 깊게 내린 미국에서도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2013년 미국에선 트위터 홈 엔터테인먼트 그룹이라는 회사의 주가가 갑자기 1400% 급등했습니다. 문제는 이 기업이 이미 파산한 상태였다는 겁니다. 주가 급등의 원인은 티커명에 있었습니다. 티커명은 기업을 연상할 수 있는 알파벳 약자입니다. 당시 이 회사의 티커명은 'TWTRQ'. 당시 기업공개(IPO) 절차를 밟고 있던 트위터(현 X)의 예상 티커명 'TWTR'과 비슷했습니다. 투자자들이 트위터 홈 엔터테인먼트 그룹을 SNS 업체 트위터로 착각해 벌어진 일입니다.
헛갈리기 쉬운 티커명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티커명 'FORD'를 쓰는 종목은 자동차 회사 포드가 아니라 '포워드 인더스트리스'입니다. 포워드 인더스트리스는 액세서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약자 HP와 프린터로 유명한 휴렛팩커드는 티커명 'HPQ'를 사용합니다. 티커명 'HP'는 석유시추회사 헬머리치 & 페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시 티커명만 비슷할 뿐 휴렛팩커드와 전혀 관계없는 회사입니다.
이런 현상이 소수 종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2019년 바딤 발라쇼프 미국 럿거스대 경영대학 부교수는 종목명, 티커명 혼동으로 발생한 투자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름이 비슷한 254쌍(508개 종목) 중 31쌍(62개 종목)의 거래량이 동조 현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한 쌍 가운데 규모가 더 큰 종목에 호재가 터졌을 때, 이 현상은 심화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잘못된 거래를 바로 잡기 위해 한 쌍당 연간 100만달러(약 13억원)의 수수료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관 투자자도 종목명 착각하는 '실수'한다"
발라쇼프 교수는 이런 움직임은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기관 투자자에게서도 발견됐다고 짚었습니다. 또 이름만 비슷한 종목에 이유 없이 수급이 몰리면 알고리즘 트레이딩에도 오류가 발생해 주가가 급등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둘 중 한 회사가 이름이나 티커명을 바꾸면 동조 현상이 사라진다"며 "동조 현상이 혼란에 기인한다는 걸 입증한 셈"이라고 설명했습니다.마지막으로 발라쇼프 교수는 혼동이 발생할 수 있는 티커 목록을 공개하고, 혼동에 의한 거래를 막을 수 있는 기술적 해결책이 도입돼야 한다고 당국에 제언했습니다. 또 투자자들은 거래 전 두 번 이상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진영기 한경닷컴 기자 young7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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