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유럽종양학회 찾은 유한양행 사장의 고민

입력 2024-09-20 17:47   수정 2024-09-21 00:26

글로벌 항암제 시장은 ‘쩐(錢)의 전쟁’이 된 지 오래다. 몸속 면역세포를 깨우는 면역항암제 기술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항체 기능을 강화한 이중항체, 항체약물접합체(ADC), 키메릭항원수용체(CAR)-T세포 치료제 등 약물 한 개를 생산하는 비용만 수천만원이 훌쩍 넘는 혁신 신약도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지난 13~1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유럽종양학회 연례학술대회(ESMO 2024)에서도 이런 변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면역항암제에 새 면역항암제를 붙여 암을 잡는 기술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면역항암제에 ADC를 더하고, CAR-T까지 적용하는 다양한 복합요법이 세계 의학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기술 퍼레이드 현장은 씁쓸한 뒷맛도 남겼다. 행사 중 만난 김열홍 유한양행 연구개발(R&D) 총괄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약에 더 좋은 약을 붙이고, 또 좋은 약을 붙이면 암을 잡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수천만원짜리 항암제를 쓸 수 있는 환자가 세계에서 몇 명이나 되겠어요.” 정작 치료받아야 할 환자에 대한 고려가 빠졌다는 의미다.

그의 지적처럼 혁신 신약 기술에 대한 암 환자 접근성은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 안에서 이를 모두 감당할 수 없어서다. 수억원에 이르는 고가 항암제 치료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 몫이 된 지 오래다. ‘자본력’이 암 환자 생존 기간을 좌우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글로벌 빅파마엔 손해가 크지 않은 구조다. 천문학적 R&D 자금을 쏟아부어 약만 개발하면 기업 가치와 약값으로 보상받을 수 있어서다. 신약 개발 후발 주자인 한국 기업들은 사정이 다르다. 국내엔 약값을 감당할 수 있는 환자 수가 적은 데다 투입할 수 있는 R&D 자금력도 제한적이다. 환자도 마찬가지다. 혁신 신약이 나올수록 ‘그림의 떡’ 같은 기술을 바라보며 생명을 잃어가는 심리적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김 사장의 말이 오히려 반가운 이유다.

대학병원 종양내과 교수로 30년 넘게 암 환자를 치료하다가 지난해 유한양행에 합류한 그는 이 회사가 다른 길을 가도록 이끌고 있다. 펩타이드 제제인 비싼 비만 주사약을 먹는 개량신약으로 대체하기 위한 후보군을 선별하고 있다. 먹는 폐암 표적 항암제 렉라자만 단독으로 미국 치료 표준인 국립종합암네트워크(NCCN)에 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현되면 더 많은 환자가 지금보다 적은 비용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

김 사장의 시선은 시장성 너머 환자를 향했다. 혁신 신약이 개발돼도 환자 고통을 해소하는 데 역부족이라면 무슨 의미냐는 취지다. 좋은 약으로 국민을 살리겠다는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도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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