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35마리의 뱀이 뒤엉켜 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징그럽고 기괴한 그림이 천경자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 ‘생태’(1951)다. 천경자는 아름다운 많은 소재를 놔두고 하필이면 뱀들을 그렸을까.
“그 속에서 나는 밤마다 뱀을 어떻게 화면에다 깔아 구도를 잡을 것인가, 눈을 감은 채 구상했다. 그 판국에 어찌 찔레꽃 향기를 찾는, 시설이 깃든 배 따위를 그리겠는가? 차라리 뱀 수십 마리를 화면에 집어넣음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천경자가 말한 ‘그 판국’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동생 옥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자와의 사랑은 고통만을 남겨주었다. 생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천경자는 그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생태’를 그렸다. 마치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뱀과 같이 독하고 지혜로워야 한다고 각오라도 하듯이….
천경자는 스스로 ‘슬픈 전설’을 가졌다고 여긴 화가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는 그림뿐만 아니라 18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기 삶을 기록한 책의 제목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하는 식이다.
‘슬픈 전설’을 가진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그림은 전시실에서도 볼 수 있다. 허공을 보고 있는 듯한 눈에서는 슬픈 한이 전해지고,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네 마리의 뱀은 22세 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하지만 저 멀리 내다보는 듯한 눈에서는 지금의 현실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읽힌다.
천경자는 색이 좋아 그림을 시작한 화가다. 그런데 8·15 광복이 되고 나자 일본에서 유행하던 채색화를 무조건 일본화로 규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채색화는 홀대받았다. 대부분 작가는 수묵화를 그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천경자는 채색화를 버리지 않았다.
천경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되자 일본화가 무엇인지 한국화(동양화)가 무엇인지 분별조차 못 하던 당시 일부 동양 화단에서는 때마침 정치적으로 민족 반역자로 친일파를 몰아치던 시류에 맞춰 내 작품도 무조건 일본화라고 몰아, 싹트기 시작한 내 예술 사상을 구둣발로 무참히 문질러댔다. 얼마쯤 지나니까 일본화라는 말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내 작품을 서양화라고 했다. 도무지 귀찮은 일이었다.”
“인생은 피곤하다.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살이다.”
이것이 어디 천경자만의 얘기일까. 그저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아끼며 조용히 살고자 해도 험난한 세상살이는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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