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듯, 우는 듯. 남자는 괴상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남자의 표정도 자화상 속 얼굴과 똑같았습니다.
한때 남자는 자신의 예술적 동지이자 큰 형님과도 같은 사람의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다 발각됐습니다. 대가는 컸습니다. 사랑은 비참하게 끝났고, 남자의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뒤 얼마 안 돼, 남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혔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리하르트 게르스틀(1883~1908). 뛰어난 재능으로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렸지만, 괴팍한 성격과 무책임한 행동은 그를 비참한 끝으로 몰아넣은 뒤 망각의 늪에 빠트렸습니다. 게르스틀의 작품이 재조명된 건 그가 세상을 떠난 후 50여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제대로 작품 활동을 했던 건 5년여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로 불리며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오는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에서 국내 최초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팔자를 자신이 꼰, 요절한 천재 화가 게르스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비엔나미술사박물관. 합스부르크 가문이 수백 년 간 수집한 거장의 그림들을 따라 그리며 연습을 하는 20대 초반의 게르스틀에게, 한 우아한 노신사가 말을 걸었습니다. 미소를 띤 노신사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게르스틀이 구겨진 표정으로 툭 하고 말을 내뱉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댁에게 부탁이라도 했나요?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죠.”
머쓱해진 노신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전시장을 나갔습니다. 노신사의 정체는 사실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의 관장. 그렇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않았어도 게르스틀은 관장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 테고, 이로 인해 그에겐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게르스틀은 그 기회를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의 삶 전체가 이 일화와도 같았습니다. 게르스틀은 반골 기질이 넘쳐나는 까칠한 사람이었고, 이 때문에 삶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1883년 비엔나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다만 게르스틀의 그림 재능 하나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확실했습니다. 15살의 나이에 최고 권위의 미술학교인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그는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던 지도교수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은 탓에, 그는 3학년이었던 17세 때 학교를 그만둡니다. 이때부터 그는 미술계에서 고립된 채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서 거장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여러 전시회를 다니며 미술을 독학했습니다. 이런 생활 덕분에 그는 당시 주류 미술계의 대세에 얽매이지 않고 에드바르 뭉크, 조르주 쇠라,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외국 화가들의 혁신적인 화풍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반면 게르스틀의 성격에는 이런 고립된 생활이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10대 후반 질풍노도의 시기에 겪은 극심한 외로움은 그의 자기애적인 성격과 불안감을 증폭시켰습니다. 이 시기 그를 만난 사람들은 게르스틀이 아주 괴팍했다고 증언합니다. 잘난 척이 심했고, 감정의 기복이 극심했고,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평가를 들으면 격렬하게 반응해서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연한 계기에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의 한 교수(하인리히 레플러)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면서, 게르스틀은 3년 만에 고립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교수의 소개로 작곡 거장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 것도 이때, 게르스틀이 스물세 살 되던 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쇤베르크를 존경했습니다. 보수적인 음악을 거부하고 혁신을 추구했던 쇤베르크처럼, 게르스틀도 당시 비엔나에서 잘나가던 예술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싫어했던 화가가 클림트였습니다. 클림트 역시 나름의 혁신가였고 젊은 시절 보수적인 미술계와 대립했던 인물. 하지만 급진적이고 반골 기질 강한 게르스틀의 눈에는 클림트 역시 고리타분한 ‘꼰대’들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쇤베르크의 눈에는 이런 게르스틀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예술적 동지가 됐습니다.
쇤베르크는 게르스틀을 친동생처럼 대했습니다. 게르스틀과 매일같이 예술에 대해 토론했고, 자신이 아는 예술가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림 과외를 부탁하는 대신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음악과 글에 재능이 있으니 음악 평론가로도 활동해 보라”는 제안도 해 줬습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립됐던 게르스틀은 쇤베르크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능 있는 예술가 대접을 받았고, 말이 통하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그야말로 쇤베르크는 게르스틀의 은인이자 큰 형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덕분에 이 시기 게르스틀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발견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이 단순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닌, 개인의 생각과 깊은 감정을 보여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눈으로 보는 세상과 내면에 있는 강렬한 감정을 그림 한 점에 녹여내는 게 게르스틀의 목표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뭉크의 ‘절규’가 그랬던 것처럼요. 게르스틀은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위해 초상화와 풍경화 등을 그리며 끊임없이 탐구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화풍을 찾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20대 초반의 새파랗게 젊은 나이로 이뤄낸 탁월한 성취이자, 표현주의의 선구자적인 행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어디 간 건 아니었습니다. 게르스틀은 “클림트 같은 낡은 화가와는 전시하기 싫다”며 큰 전시회에 작품을 내는 걸 거부하는가 하면, 자신의 진가를 처음으로 알아봐준 스승(레플러)이 고리타분하다며 대판 싸우고 교육부에 투서까지 넣었습니다. 지금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몰상식한 행동이었습니다. 쇤베르크가 알아봐 준 전시 기회마저도 그는 마음에 안 든다며 걷어차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전시 기회를 주선해 준 쇤베르크는 민망한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민폐는 곧 벌어질 사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황급히 도망 나온 게르스틀은 비엔나로 돌아갔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건, 마틸데가 게르스틀을 따라갔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불륜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깊었고, 마틸데에게는 게르스틀과 새출발을 할 마음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쇤베르크는 즉시 비엔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틸데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결국 마틸데가 게르스틀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쇤베르크. 여전히 마틸데를 사랑했던 그는 간곡한 설득에 나섰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봐서라도 제발 집으로 돌아와 줘. 그 날 일은 더 묻지 않을게….” 쇤베르크의 애원에 마틸데는 일단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틸데는 게르스틀과의 불륜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마틸데는 남편 몰래 게르스틀의 작업실을 오갔습니다. 게르스틀은 마틸데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불륜이 발각된 지 3개월만인 11월 초, 게르스틀은 마틸데에게 청혼했습니다. “이제 결정을 해 줘. 남편과 헤어지고 나랑 살자.” 일종의 최후 통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틸데에게서 돌아온 답은 거절이었습니다. “미안해. 아이들을 버릴 수가 없어.”
불륜 사건 이후 자신의 유일한 친구들이었던 쇤베르크의 주변 사람들은 자신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리고 모든 걸 버릴 각오로 사랑했던 마틸데마저 자신의 곁을 떠났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그에게 이제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장 최악인 건, 이 모든 일이 자업자득이었다는 겁니다. 게르스틀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며칠 뒤,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들의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쇤베르크의 그룹을 후원하는 사람들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예술가들이 모두 참석하는 행사였지요. 물론 게르스틀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콘서트가 시작해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고 있던 그 시간. 홀로 작업실에 있던 게르스틀은 자신이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사생활이 담긴 모든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리고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게르스틀의 작품이 품고 있는 천재성과 표현주의 선구자로서의 측면이 재평가된 건 또다시 20여년이 흐른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여기엔 오스트리아의 대수집가이자 레오폴트 박물관의 종신 관장이었던 루돌프 레오폴트(1925~2010)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레오폴트 박물관은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게르스틀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에도 일찍 지고 만 게르스틀의 작품과 생애를 살펴보고 있자면, 요즘 말로 ‘지팔지꼰’(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생활이 지저분한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예술가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아주 깊이 들여다보고 이를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직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 중에서는 일반인들이 사회 생활과 정신 건강을 위해 억누르거나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욕망이나 충동, 어두운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고집이 아주 센 사람도 많습니다. 독창적이라는 건 이때까지 있던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는 것. 그러니 대부분의 독창적인 작업은 처음에는 나쁜 평가를 받습니다. 남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는 평범한 사람은 이런 비난을 버티지 못합니다. 예술가들 중 좋게 말하면 ‘자유로운 영혼’, 나쁘게 말하면 반골 기질을 가진 사고뭉치가 많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게르스틀은 도를 지나쳤습니다. 그의 커다란 재능도 내면의 어둠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시기 비엔나에서 활약했던 천재 화가들 중에서 유독 이런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는 겁니다. 수백 년 역사의 웅장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는, 한 역사가 종언을 고하는 현장에 있다는 불안과 허무함 때문이었을까요. 반면 그 덕분에 이 때 비엔나의 예술은 다른 어떤 미술사조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이 있습니다. 게르스틀은 그중에서도 가장 짧은 삶을 산, 가장 막 나갔던 예술가였습니다.
덕분에 게르스틀의 작품은 강렬합니다.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감정 중 하나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흐의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가 그의 성격적 결함이나 정신 질환 대신 작품의 예술혼과 독창성에 집중하듯, 게르스틀의 작품을 볼 때도 그 작품 속 강렬한 감정과 탁월한 표현의 매력을 눈여겨보면 됩니다. 곧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Richard Gerstl(Diethard Leopold 지음), The New Yorker 지의 2017년 기자 ‘The Final, Shocking Self-Portrait of Richard Gerstl’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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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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