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경제 일군 克日 60년…진격의 K는 멈추지 않는다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입력 2024-09-22 18:25   수정 2024-09-23 01:10

한국경제신문이 창간된 1964년은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해 사상 처음으로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그것도 전란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가발용 머리카락과 코리안밍크로 불리던 쥐털을 팔아 이룩한 개가다. 물론 1964년 수출 67억달러를 기록한 이웃 나라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한 경제력이었다. 공업화의 여명은 아직 밝아오지 않았고, 이제 막 자리 잡던 의류와 봉제공장은 비숙련 여공의 비인간적 노동으로 돌아갔다. 돈을 빌려주겠다는 일본 등의 상업차관은 넘쳐났지만 산업 원자재를 한국에 수출하거나 완제품을 저가로 본국에 가져간다는 단서 조항이 달려 수출이 늘어날수록 무역 적자도 커지는 구조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107달러. 전체 인구의 80%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글만 깨치고 나면 모두 가망 없는 농업에 매달리던 시절이다.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은 거대한 창업국가 건설과 맥을 같이하는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자 국민도 서독 탄광과 베트남 전쟁터, 중동 건설 현장에서 함께 뛰었다. 그리고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신격호, 조중훈, 박태준, 김우중 같은 당대 창업자들이 있었다. 울산 창원 구미 포항 여수의 거대 산업단지를 새로운 시설과 젊은 근로자로 빼곡히 채운 것이 그들이다.

미지의 바닷길을 헤쳐 나가는데 항법 장치도 없고 지도도 없었다. 일본을 제외하고는 어떤 나라도 벤치마커가 되지 못했다. 1970년 일본의 수출은 우리나라의 23배, 1975년엔 11배에 달했다. 그럼에도 한국을 돕고 지원하는 데 인색했다. 차관과 투자에는 늘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붙어다녔고 기업 차원의 기술이전도 미미했다. 당시 일본 자본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무지 가망이 없는 곳이라는 것, 또 하나는 장래 경쟁 상대로 클지 모르니 아예 싹을 잘라 놔야 한다는 것. “당신들이 어디에 쓴다고 그 많은 철강이 필요하냐”며 끝까지 포항제철 설립에 반대하고 한국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한 차관 공여를 거절한 연유다. 천하의 정주영도 조선업 초기 일본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여러 차례 퇴짜를 맞았다. 일본은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실리적이었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한 완제품을 수출해 돈을 버는 우리나라에 핵심 부품과 설비를 팔아 매년 큰 폭의 무역흑자를 냈다.

우리 기업의 기술 자립도 요원했다. 출발 지점의 격차가 워낙 컸다. 금성사(현 LG전자)가 수입 부품으로 범벅이 된 라디오를 처음 만든 때가 1959년이다. 소련이 그보다 2년 앞서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고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을 때 우리는 겨우 라디오를 조립한 것이다. 소니는 과거 도쿄통신공업을 사명으로 하던 195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해 세계적 전자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70년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 삼성전자는 산요 및 NEC와 손잡았지만 그들에게서 효용이 다한 기술을 비싼 값에 사들이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산업은 일본을 넘어서지 못하면 세계 시장에서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운명이었다. 모든 산업에 일본 선진기업이 포진해 있었다. 더욱이 우리는 북한의 안보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경제성장 방법론을 놓고 끊임없이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균형성장이냐 불균형성장이냐, 내수냐 수출이냐, 관 주도냐 민간 주도냐 논란이 대표적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 운동과 외자망국론이 등장한 게 그 무렵이다. 해외 차관을 들여와 공장 짓고 수출하면 외국 자본만 돈을 벌고 우리는 거기에 종속될 게 뻔하니 산업화 전략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대학교수들 사이에서 횡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정치적 억압과 별개로 제한된 국가자본의 전략적 배분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투자를 이뤄냈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기회는 위기 속에서 꿈틀거린다. 한국 경제 60년 성장사를 압축하는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코 1973년 오일쇼크를 들겠다. 지구상 어떤 국가도 상상하지 못한 대반전의 역사를 우리가 썼다. 그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배럴당 2달러대이던 원유가격은 11달러대로 다섯 배 이상 치솟았다. 막 태동하던 제조업은 그야말로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일본도 도매물가 상승률이 20%대로 뛰고 상장사 절반이 적자로 돌아섰다.

반전은 이듬해 일어났다. 한국 기업이 오일달러가 넘쳐나던 산유국들의 건설특수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모든 역량과 채널을 동원해 중동 진출을 뒷받침했다. 열사의 사막에 가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절박함, 일자리가 없어 몸이 근질근질한 청년들,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입증된 공기 단축이 중동 공략을 향한 세 개의 화살이었다. 1980년 중동 건설 수주액이 1975년의 10배를 넘어섰다는 통계는 그 진격이 얼마나 전격적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현대그룹이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항 공사를 수주한 게 대표적이다. 외환 보유액을 늘리고 자본을 축적해 중화학공업을 본격화하는 기반을 다졌다. 1976년과 1977년 투자 증가율은 각각 15%와 27%로, 경제성장률은 13%와 12%로 뛰어올랐다. 1975년 51억달러이던 수출은 불과 2년 뒤인 1977년 100억달러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목표를 4년이나 앞당긴 것이었다.

1980년대는 일본의 독무대였다. 1970년대 후반 이란혁명 발발로 또다시 원유값이 34달러로 치솟았다. 일본 기업은 1차 쇼크의 충격을 거울삼아 산업 체질을 완전히 바꿨다. ‘경박단소(輕薄短小)’로 일컬어지던 에너지 절약형 제품을 앞세워 세계 전자·자동차 시장을 석권한 것. 그리고 컴퓨터, 반도체, 신소재, 광통신 등 신산업에 눈길을 돌렸다. 한국 경제도 1980년대 중반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에 힘입어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12%의 기록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여기에 반도체라는 희대의 전략병기가 우리 경제에 입고됐다. 이병철 회장이 시작해 이건희 회장 대에 메모리 시장을 평정한 삼성 반도체가 최대의 달러박스로 떠올랐고, 1995년 한·일 수출 격차는 28 대 100으로 완화됐다. 1998년 외환위기를 기업 체질 개선과 산업 혁신의 기회로 전환하는 데도 성공했다. 삼성이 2000년대 소니를 제친 데 이어 일본 전자기업 전체 매출을 능가하는 이정표를 세우며 2005년 수출 격차는 50 대 100으로 좁혀졌다.

한국의 디지털 전환은 기민했고 기업들의 첨단화는 더욱 가속화했다. 세계 3대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한 현대자동차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비약적으로 늘어 한때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던 외국계 컨설팅사들을 부끄럽게 했다. 2021년엔 북미 시장에서 처음으로 일본 혼다를 넘어서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일본 경제는 노쇠 기미가 완연했다. 제조업의 디지털화가 지연되면서 통화정책에만 매달린 것이 추격을 허용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엄청나게 불어난 나랏빚에 짓눌려 과감하게 재정을 풀 수도 없었다. 2000~2020년 한국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56배로 성장하는 동안 일본은 사실상 제자리인 1.02배에 그쳤다.

마침내 우리 경제는 2014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에 도달한 뒤 올해로 11년 연속 대열 유지를 앞두고 있다. 3만달러 달성을 선진국 진입 지표로 삼는다면 미국은 독립 220년 만, 독일은 패전 51년 만인 1996년에 나란히 3만달러를 넘어섰다.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그보다 4년이나 앞선 1992년에 진입했다. 상대적으로 수출제조업 기반이 약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2004년에야 문턱을 넘어섰다. 물론 물가상승률에 따른 통화가치 하락, 잦은 환율 변동 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3만달러 소득을 20년 전, 30년 전 다른 국가들 소득과 견줄 수는 없다. 그때의 그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부유하고 강했다. 하지만 일본과의 비교는 분명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1인당 소득은 3만6194달러로 사상 처음으로 일본(3만5793달러)을 앞섰다. 원화와 엔화는 달러화 대비 동반 약세를 보였기에 충분히 수평적 비교가 가능하다. 연간 7000억달러를 넘보는 수출도 올해 사상 첫 역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살아낸 개발 시대 주역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신세계가 열렸다. 한국 경제의 상대적 약진은 산업국가로서 숙명적 경쟁 상대인 일본의 퇴조 덕을 본 측면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동력을 꼽는다면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위대한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위대한 창업 시대를 살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사업과 제품 혁신에 뛰어들어 지구적 영토 비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전 세계 GDP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그 영토를 3%, 4%로 넓혀 나갈 준비와 전략이 필요한 시기다. 그 길이 숨찬 오르막이라고 해도 폐허를 딛고 일어난 과거 세대의 어려움에 비할 수 있겠나.

서정환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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