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건전지보다 위험한데…폐의약품 수거율 고작 10%, 毒이 된 약

입력 2024-09-23 17:34   수정 2024-10-02 16:10


연간 6000t에 달하는 폐의약품 중 수거 절차를 밟아 폐기되는 의약품은 단 10%가량에 불과하다.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종량제 봉투에 일반 쓰레기와 함께 버려진다. 액체성 폐의약품은 가정 내 하수구를 통해 배출된다. 폐건전지 못지않게 인체와 생태계에 유해하지만 정부는 지금까지 폐의약품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수거 정책 마련에 손을 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령화로 폐의약품이 날로 늘어나는 만큼 체계적인 연구와 함께 폐건전지 회수 정책에 준하는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폐의약품 매해 수천t ‘그냥 버린다’
23일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폐의약품 수거량은 712.8t 규모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2년 486.9t 대비 46.3% 늘어난 규모다. 그러나 약국 등을 통해 수거된 폐의약품은 ‘빙산의 일각’일 뿐 대부분의 폐의약품이 일반 쓰레기나 하수구로 버려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동아제약 관계자는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의약품 복용이 늘어 2025년엔 6700t의 폐의약품이 발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용량이 늘어난 만큼 버려지는 폐의약품도 폭증하고 있다는 얘기다.

2008년부터 환경부가 약국을 통한 폐의약품 수거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에 갈수록 약국의 호응이 떨어지고 있다. 폐의약품 정상 수거 비중을 파악하는 전국 단위 통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18년 실시한 ‘폐의약품 처리 방법 설문조사’가 마지막이다. 당시 조사에선 약국·보건소를 통한 폐의약품 수거량이 버려지는 의약품 양의 7.8%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약업계 등에선 심평원 통계와 2012년 국립환경과학원이 산출한 불용 의약품 가정 내 보관량(9345t) 등을 근거로 매해 수거 없이 일반 쓰레기로 버려지거나 하수구를 통해 버려지는 폐의약품이 최소 4000t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해외에선 폐의약품 수거·소각
무단으로 버려진 의약물질은 하천으로 흘러들어가거나 매립지의 침출수를 통해 땅으로 유입돼 다양한 생태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2007년 캐나다 뉴브런즈윅대 연구진은 작은 호수에 피임약 성분인 합성 에스트로젠을 실제 하수에서 검출되는 수준인 L당 1pg(1pg은 1조분의 1g) 농도로 방류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수컷 피라미가 암컷으로 바뀌어 번식이 끊겼다.

2000~2005년 인도 북부지방에선 독수리 개체가 갑작스레 90% 이상 사라졌다. 미국 시카고대 연구진은 인근 우제류 목장에서 사용되는 항염증제 다이클로페낙이 독수리에게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폐의약품으로 인한 오염이 심화하고 있다. 국립환경과학원이 지난 4월까지 1년간 4대강 130곳에서 19개 의약물질 검출량을 조사한 결과 고혈압치료제인 텔미사르탄, 진통제인 트라마돌, 당뇨병 치료제인 시타글립틴 등 19종의 의약물질이 광범위하게 발견됐다. 폐의약품 가운데 특히 마약류와 항생제, 피임약 등이 무단 폐기에 따른 유해성 위험도가 높다.
약국에 맡겨놓고 정부·지자체 ‘뒷짐’
제약 선진국들은 폐의약품이 생태계에 끼치는 문제를 인식하고 오래전부터 처리 규정을 마련해 운영해왔다. 약을 팔 때부터 수거용 봉투를 나눠주고, 제약업체에 수거를 의무화한 뒤 모은 의약품을 특수 소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벨기에와 스웨덴, 프랑스 등이 이런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국내 폐의약품 수거제도는 ‘환경부 권고’ 수준에 머물러 참여율이 저조하다. 229개 기초지자체 중 폐의약품 관련 조례를 갖춘 곳은 120곳 수준이며, 그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약국 말고도 접근성이 좋은 장소에 수거함을 설치하거나, 가정 내 보관된 폐의약품을 한꺼번에 버리는 ‘회수의 날’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폐의약품에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와 같은 의무 수거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안정훈/박시온 기자 ajh632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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