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서울 출장을 간다고 할 때 집에 일이 있다고 얘기해 외박증을 받아 같이 부대를 빠져나왔다. 제대를 몇 달 남겨둔 말년 병장 때다. 시내서 여럿을 만나다 집에는 늦게 들어왔다. 밖에서 한참은 기다렸을 어머니가 “아이고. 왜 인제 오냐? 과장님이라는 소령님이 전화하셨다. 일이 늦어져 내일까지 계셔야 한다며 너는 먼저 귀대하라고 하시더라”라고 했다. 나는 대뜸 “그 사람 참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서울만 나오면 일을 일부러 만드네”라고 혼잣말을 했다.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바깥 얘기를 다 들은 아버지가 “뭔 소리를 하는 거냐”며 냅다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부대에서도 윗사람을 그렇게 부르냐? 상사는 상사다. 가까운 사람과 있을 때 네 말이 새나간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습관이 무섭다. 상사를 존경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사석에서도 반드시 경어를 써야 한다. 경어를 쓰지 않는다 해서 네가 대단하다고 아무도 여기지 않는다. 높임말을 썼다고 네 인격이 깎이는 것 또한 아니다”라며 책망했다. 이어 “불과 두서너 달 전에 새로 부임한 과장님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며 네 입으로 얘기했는데, 네 인물 평가가 채 일 년도 못 간다는 말이냐? 그분이 그 자리까지 승진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걸 발견 못 한 너는 대체 나이 먹어도 어찌 그리도 경박하냐?”라고 나무랐다.
아버지는 이내 태도를 바꿔 “그동안 잘 참고 견뎌냈다”라고 운을 뗀 뒤 “제대를 앞둔 지금이 권태기”라고 진단했다. 일반적으로 권태는 반복적이고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느낀다. 일상적인 활동이나 업무가 반복되면 자극이 부족해져 동기 부여가 떨어지고 권태를 느낀다. 아버지는 “권태는 마치 계절이 바뀌듯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권태는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권태는 단순히 지루함이나 무기력함을 느끼는 상태다. 권태가 오면 나를 추스를 때다. 자기성찰하라는 신호다. 이때야말로 현재의 삶에 대한 재평가나 변화를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권태는 기회다”라고 길게 설명했다.
권태(倦怠)를 “‘게으를 권’과 ‘게으를 태’자를 써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이라고 정의한 아버지는 파자해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권(卷)’자는 ‘병부 절(?)’자와 ‘분별할 변(?)’자, ‘받들 공(?)’자가 결합해 ‘책’이나 ‘두루마리’, ‘(돌돌)말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다. 죽간(竹簡)을 손으로 마는 모습을 표현해 본래 의미는 ‘말다’였다. 그러나 후에 말아놓은 죽간 자체를 뜻하게 되면서 ‘책’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지금은 여기에 ‘손 수(?)’자를 더한 ‘말 권(捲)’자가 ‘말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태(怠)’자는 수저를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을 그린 ‘별 태(台)’자와 ‘마음 심(心)’자가 결합했다.
아버지는 ‘나태는 천성이고 권태는 인성이다’라고 구분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복잡하고 개인마다 다양하다. 이런 감정은 인간관계의 특성, 개인의 심리 상태, 그리고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네 상사인 그분의 행동이 예측할 수 있고 반복돼 자극을 주지 못한 데 있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아버지는 “기대했던 새로 온 상사가 더는 자극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 단순한 싫증”이라며 많은 사람들은 권태를 느끼고 거기서 그친다. 그러나 “그의 숨은 실력을 찾으려는 노력, 즉 사람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태를 뛰어넘을 것을 주문했다.
그 방법으로 제시한 고사성어가 ‘낙선불권(樂善不倦)’이다. ‘좋은 일을 즐겨 하며 싫증 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진 성품’을 비유한 이 말은 맹자(孟子)의 ‘고자(告子)’ 편에 나온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벼슬인 ‘천작(天爵)’과 사람이 수여한 벼슬인 ‘인작(人爵)’이라는 것이 있다. 어짊, 의로움, 충성, 신의 등 좋은 일을 즐겨 하며 싫증 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천작이다[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공경대부(公卿大夫)’ 같은 벼슬, 이것이 바로 인작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천작을 수양하면 인작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요즘은 사람들이 천작을 수양해 인작을 얻으려 하고, 인작을 얻게 되면 천작을 버리니 너무나 어리석도다. 천작을 버리면 결국 인작마저도 잃게 된다.”
“권태는 단조로움에서 오는 염증이다”라고 한 아버지는 사람 공부에 진력한 선인들을 소개했다. 그런 사람 공부 끝에 중국 삼국시대 순욱(荀彧)이 찾은 인재는 580명, 제갈량(諸葛亮)은 480명, 노숙(魯肅)은 450명이다. 모두 권태로워하지 않은 분들이다. “남을 다른 이에게 추천할 때 학연, 혈연, 지연, 직연은 필요 없다. 오직 실력이다. 적을 만났을 때 적이 그걸 어찌 알겠느냐? 이겨야 하는 싸움판에서는 생김새, 말소리, 힘, 무기, 실력 따위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정보만으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 권태를 넘어 사람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남에게 그가 나보다 낫다고 추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나은 보람을 찾지 못했다. 그게 최고의 낙선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서 하던 장난감을 사주자 오래지 않아 싫증을 느끼는 손주들을 볼 때 문득 아버지가 강조한 권태가 떠오른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손주지만, 저 때부터 일찍 가르쳐주어야 할 소중한 인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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