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얼마나 먹어야 어른이 될까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4-09-24 17:21   수정 2024-09-25 09:08


늦더위도 물러간 이른 가을 오후, 동네 카페에서 창밖 단풍 드는 활엽수를 보다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건 놀랍고도 하찮은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낮과 밤이 오고 숱한 생명체들이 번성하는 이 작은 녹색 행성에서 한 생을 보낸다는 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그렇지만 우리가 죽기 전 지구에서 5500만㎞ 이상 떨어진 화성에서 지구의 일몰을 바라보는 기적은 없을 테다. 그런 난망한 기대보다는 차라리 모나지 않은 인격을 가진 어른이 되려는 꿈을 갖는 게 훨씬 더 현실성이 높을 테다.

덩치만 큰 '어른 아이'들 많아

서른 무렵, 이제 어른이 됐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다. 아이를 키우고 사업체를 꾸렸으니 나도 어른이라고 여겼을 테다. 돌이켜보니 그 시절 나는 어른이 아니었다. 어른이란 생각, 느낌, 의지가 조화로운 인격체여야 하는데, 내게는 어딘지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그런 탓에 함부로 내뱉은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며, 매사 남 탓하는 사람은 어른이 아닐 테다. 이들은 ‘어른 아이’라고 해도 좋겠다. 참어른이 드물다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는 ‘사람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라는 생각을 곰곰이 했다.

어린 시절, 사람은 애초 어린애는 어린애로, 어른은 어른으로 태어나는 줄만 알았다. 늦된 탓에 나이를 먹은 뒤 어린애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이가 들고 몸집이 커졌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 많이 배우고 익힌 뒤 그걸 실천하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제 삶에 얹힌 짐을 지고 제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말과 실천이 다르지 않고, 제 잇속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 어른이다. 말에 품격이 있고 생각에 삿됨이 없으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줄 알아야 어른이다. 무엇보다도 철이 들어 속이 꽉 차 있는 사람이 참어른이다.

언어 품격, 사고 유연성, 존경심…

우리 주변에 덩치는 크지만 미숙하게 행동하는 ‘어른 아이’가 많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내면의 견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에나 ‘꼰대’들은 넘치지만 그 가운데에서 어른 찾기는 어려운 시대다. 한 인물 다큐멘터리 제목에 ‘어른’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어른 김장하’를 본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어른이라고 감탄했다. 그 주인공은 한의사이자 한약방을 하며 평생 번 돈을 남을 위해 썼는데, 그에게서 본 것은 우리 시대에 드문 참어른의 표상이다.

2500년 전 동아시아의 현자로 이름이 높은 공자는 숱한 어록을 남겼다. 공자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곧 만사를 안 것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여 그것을 구한 자이다”(‘술이’편)라고 <논어>에서 말한다. <논어>는 끝없는 공부와 수양으로 깨달은 지혜, 즉 어른으로 사는 도리를 깨친 자의 어록집이다. 공자는 배우고 익힌 바를 널리 베풀었으니, 그를 흠모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라는 말을, 나는 공자 어록에서 으뜸으로 꼽는다. ‘도’란 사람이 마땅히 따르고 가야 할 길이라고 받아들인다. ‘도’는 수양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총명과 덕목이고, 어른의 품격을 빚는 필요조건일 테다. “빨리하려고만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려고 하지 마라. 빨리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다 보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자로편’)라는 말은 어른의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 할 의젓함이 아닐까?

어른은 기꺼이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제 부모를 섬긴다. 겨울 새벽에 집 안팎을 돌아보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가족의 안위를 먼저 보살피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다. 어른의 일과 그 방식을 이해하고 일을 맞춤하게 꾸리는 사람이 어른이다. 어른의 말본새를 갖추고 제 생각과 일치하는 어휘를 골라 말하는 사람, 어휘력 빈곤으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소통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어른이다. 언어의 품격이 없다면 당연히 어른의 품격도 없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람, 쩨쩨하지 않고 사리 분별이 또렷한 사람, 제 앞가림을 해내는 사람, 비속어 없이도 생각을 펼칠 수 있고 성숙한 자아를 갖춘 사람, 가까이 가면 사람다운 향기가 나는 사람, 친해질수록 배울 게 많고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사람,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어른이다.

경륜 어울리는 선한 영향력도

해마다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마음을 굳게 다지건만 좋은 어른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 일쑤다. 절망에 빠졌다. 어른이란 매사를 돌아보고 옷깃을 여미며 사는 사람이다.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제 삶을 경영하고, 남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나는 여러모로 그 기준에 못 미쳤다. ‘서시’는 1941년 11월 20일, 윤동주가 나이 24세 때 쓴 작품이다. 윤동주는 제 몸의 보신과 영달보다도 예민한 양심에 저를 비춰보고 돌아보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노래한다.

제 말과 행동에서 부끄러움을 찾고, 제 누추함을 돌아보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사라진 시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구절을 가만히 읽어 보시라.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 양심이 찔린다는 청년 시인의 시구가 가슴에 박힌다면 당신은 참어른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다. 아마도 그건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갖고 산다는 뜻이다. 시인의 수사법을 빌리자면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품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으로 산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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