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와 아이들 위해서"…아이돌서 페인트공 '깜짝 변신' [본캐부캐]

입력 2024-09-28 15:47   수정 2024-09-28 18:52



대한민국 성인남녀 절반 이상이 '세컨드 잡'을 꿈꾸는 시대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캐(부캐릭터)'를 희망하며 자기 계발에 열중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꿉니다. 이럴 때 먼저 도전에 나선 이들의 경험담은 좋은 정보가 되곤 합니다. 본캐(본 캐릭터)와 부캐 두 마리 토끼를 잡았거나 본캐에서 벗어나 부캐로 변신에 성공한 이들의 잡다(JOB多)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편집자주>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 아이돌은 오지민(30) 씨에게 '너무 하고 싶은 일'이었다. 팀 해체 소식을 접하던 날을 떠올리며 그는 "데뷔했을 때보다 더 꿈 같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 '이건 꿈이다'라면서 계속 회피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오 씨는 2014년 데뷔한 그룹 BTL에서 '엘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한계를 초월한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데뷔했던 BTL은 안타깝게도 2년여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해체했다. 활동 당시의 기억을 더듬던 오 씨는 "토를 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아이돌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1년 5개월째 페인트 롤러를 잡고 있다. 군 복무 중 현재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제대와 동시에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오 씨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지인 회사에 다니기도 했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기술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페인트 집 사장님이 회사 생활을 해보고 답이 없겠다 싶으면 알려줄 테니 찾아오라고 하더라. 그렇게 페인트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 현장에 갔을 땐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오 씨는 "양손에 페인트 20kg을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와이프와 아이들이 없었다면 바로 집에 갔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최소 6개월은 지나야 슬슬 적응된다면서 "몸이 몇 개월 동안 아팠다. 그래서 오래 일하신 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늘 아픈 거라고 하더라. 보통 가장 많이 쓰는 손가락부터 손목, 어깨 등이 늘 아프다"고 전했다.


일당을 받으며 현장을 다녔던 오 씨는 지난 7월 사업자 등록을 해 이제는 직접 본인의 일을 따내고 있다. 사업을 하는 건 처음인데다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부담스러운 선택이 아니었냐고 묻자 "기술을 더 많이 익히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때 사업자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생후 37개월, 8개월 자녀 둘을 키우고 있는 그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것과 내 현장을 따는 것은 수입에서 차이가 크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공정을 잘 익혔으면 훌륭한 기술자분들을 모실 수도 있는 거다. '20만원 받던 일을 똑같이 하는 데 1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자신감을 갖고 시작했다"고 밝혔다.

정체돼 있다는 느낌도 오 씨를 자극했다고 한다. 그는 "페인트 관련된 모든 시공을 한다. 색깔만 칠하는 걸 페인트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면 작업도 다 한다"면서 "몇십 년 일하신 분도 아직 배울 게 많다고 한다. 그럼 난 얼마나 더 있어야 사업할 수 있는 건가 싶더라. 부딪히고 깨져야 실력이 늘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사장님'의 역할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마음의 짐이 생겼다. 오 씨는 "사업자등록을 하고 현장 땄는데 정말 다사다난했다"면서 "내 현장이 생기면 직원들이 일하는 것부터 경비까지 모든 걸 챙기고 계산해야 한다. 처음에는 부담감 때문에 밥도 못 먹었다. 남은 공정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으니 밥이 안 들어가더라"고 전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현장 견적을 맞추는 일이었다고. 그는 "기간, 인력, 재룟값을 맞췄는데 그게 다 틀렸다. 맨날 일꾼으로만 일해서 현장 데이터가 없었던 탓이다. 내가 넣은 견적에 예산이 안 맞아서 마이너스가 나곤 했다"면서 "주변 스승님들한테 얘기하니 '형도 처음엔 그랬다'면서 방법을 알려주더라. 사장이 되니 '날 가르치던 스승님들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어떤지 묻자 "조금 나아졌다. 아직 한참 부족하긴 한데 데이터가 쌓여가고 있다"면서 "한 달 작업 건수가 15~20건 정도 된다. 물론 현장마다 견적의 차이가 있긴 하다"고 답했다.

일과는 이른 새벽 시작된다. 대부분의 현장에 6시 반쯤 도착해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7시부터 작업에 돌입한다고 했다. 일당을 받고 일할 땐 오후 3, 4시쯤이면 퇴근하지만 사장님이 되니 퇴근 시간이 사라졌다. 오 씨는 "추석 연휴에도 일했다. 명절이라 일꾼도 섭외가 안 돼서 혼자 했다. 내 일을 할 때는 대중이 없다"며 미소 지었다.

비록 몸은 고되지만 일에 대한 만족도는 "굉장히 높다"고 했다. 오 씨는 "일이 좋고 재밌고, 번 돈으로 와이프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걸 해줄 수 있다는 게 내겐 되게 큰 행복이다. 이런 점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아이돌 활동 당시의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그였다. BTL 멤버 일부가 재데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오 씨는 비록 현업으로 바빠 함께하지 못했지만 방송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멤버들은 추억을 공유하며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중한 인생 친구가 됐다.

가족 역시 삶의 이유이자 원동력이었다. 오 씨는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건 아내와 아이들 덕분이다. 항상 아내에게 '당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다. 당신과 아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고 잘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와이프랑 다투면 일이 손에 안 잡힌다. 확실히 가족의 힘으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현재의 일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각오도 전했다. 삼화페인트 본사와 협업이 성사돼 제품 홍보 콘텐츠 등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오 씨는 "페인트 업체들이 서로 응원해 주는 분위기라서 네트워크를 전국구로 넓혀서 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서 일이 들어와도 서울에서 일할 분들을 다 데려가는 게 아니라 그 지역의 협력 업체랑 같이 일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교육을 통해 이 일을 알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기술도 알려드리고 현장도 연결해드리고 싶다"는 목표를 밝혔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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