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집권 자민당 신임 총재는 결선 투표에서 물리친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과 비교해 한·일 역사 문제 인식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새로운 갈등 거리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 들어 개선된 한·일 협력 관계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소재·부품·장비 등 공급망 분야를 비롯해 경제 협력도 원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시바 총재는 2019년 8월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결정 이후 자신의 블로그에 독일의 전후 반성을 언급하며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당시 “우리나라(일본)가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정면에서 직시하지 않은 것이 많은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에도 한국에도 ‘이대로 좋을 리가 없다. 오부치 게이조 총리·김대중 대통령 시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이시바 총재에 대해 “기본적으로 ‘잘못한 것은 인정하자’는 인식을 갖고 있고, 방위에 관심이 많아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며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같은 외교 노선을 밟으며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재·부품·장비 등 공급망 협력도 원활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시바 총재는 2019년 아베 신조 전 내각이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경제 보복에 나섰을 당시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결코 기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경제 제재가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도 강조했다.
다만 이시바 총재가 집권 이후 한국이 원하는 수준까지 전향적 자세를 보일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는 “이시바 총재가 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같은 (전향적인) 역사 인식은 아니다”며 “한국인이 (역사 문제에서) 원하는 지도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안보통’으로 꼽히는 이시바 총재가 이번 선거에서 내건 정책 중 일부는 한국과 충돌을 빚을 가능성도 있다는 진단이다. 이시바 총재는 “일본에는 50개 기본법이 있는데 안보기본법이 없다”며 기본법 제정부터 나설 방침을 시사했다. 안보를 더욱 강화해 일본의 독립과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시바 총재는 미국의 핵무기를 일본에서 공동 운용하는 ‘핵 공유’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핵 공유는 일본이 핵을 보유하거나 관리권을 갖는 게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을 공유하자는 것”이라며 “일본의 ‘비핵 3원칙’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주일미군에 법적 특권이 인정되는 미·일지위협정에 대해선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일본 자위대와 공동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본의 책임도 커지겠지만 주권국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메커니즘을 활용하겠다는 생각도 밝혔다. 이시바 총재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았다”며 “유엔이 무력했다”고 지적했다.
유엔이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시바는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해야 한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미국 대선 결과가 한·미·일 협력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다만 그동안 한·일 관계는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유지된 점이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을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김종우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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