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초반의 안과의사 정진기 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애주가다. 한창때 주량이 소주 네다섯 병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하다. 선후배들과 어울려 밤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꼭 3차를 가야 자리가 끝난다. 그래서 별명도 ‘정삼차’다.
그런 그가 싫어하는 술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레드 와인이다. 아예 와인 모임은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지독한 숙취 때문이다. 기껏해야 두어 잔을 마셨는데도 다음 날 아침에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는 것. 주당에게는 무척 자존심 상할 일이다.
와인과 두통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던 정 원장은 수소문 끝에 와인 속에 함유된 보존제에서 그 답을 찾았다. 산화를 막기 위해 첨가하는 아황산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 실제 항간에는 ‘레드 와인 두통(Red Wine Headache)’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정말 그럴까. 그 답은 ‘아니오’다. 색깔이 없고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무기화합물 아황산은 억울하다. 이산화황 또는 무수아황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물질은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 시대부터 음식물의 산화방지제로 사용해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됐다.
적당량 사용하면 박테리아를 없애고 이스트를 활성화하는 등 인류생존에 긍정적 작용을 한다. 또한 와인의 장기 보관 중에도 변질을 막아주는 고마운 물질이다. 이처럼 사용 이익이 많은데도 ‘두통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김준철 와인스쿨 원장은 “아황산이나 염소와 같은 물질을 극소량 첨가할 경우 인체에 해롭지 않지만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등에는 치명적이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식품 보존제는 그것이 주는 위험성보다 그로 인한 혜택이 훨씬 크기 때문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규정에 따르면 와인의 아황산 첨가량 기준은 최대 350ppm(0.0350%)이다. 그에 비해 건조 과일류는 1000ppm에 달한다. 또 건조 채소류와 건조 버섯류, 건조 감자는 500ppm이다. 다른 식품에 비하면 와인의 이산화황 사용량은 극히 적은 편이다.
그렇다면 ‘와인 두통’의 원인은 뭘까.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의 주장에 따르면 레드 와인에 함유된 건강한 항산화제로 알려져 있는 퀘르세틴(Quercetin, 플라보노이드의 일종)이 알코올 대사를 차단하면서 머리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
소량의 퀘르세틴이 혈류로 들어가면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 효소를 억제해 독성이 높은 아세트알데하이드가 고스란히 몸 안에 축적돼 홍조나 두통, 메스꺼움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와인 메이커는 자연적인 방법 또는 화학약품인 아황산을 사용한다. 산화를 막고 유통 및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다. 그와 함께 와인의 맛을 개선하고 아로마를 유지시키는 등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아황산을 첨가하지 않은(NSA, No Sulfites Additive) 내추럴 와인의 인기가 높다. 또 호주 맥라렌 베일에 위치한 와이너리 몰리두커에서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산화 방지제 질소를 보존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질소는 기체이기 때문에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아황산에 대한 논쟁은 혼란스럽고 오해가 많은 주제다. 그러나 양조 과정 시 아황산을 인공적으로 첨가하지 않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인류가 먹고 마시는 음식물과 아황산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다. 보존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아황산은 죄가 없다.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