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기술 전환기 한국이 맞는 기회

입력 2024-10-02 17:29   수정 2024-10-03 00:18

최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현재의 세계 경제 상황이 1920년대 대공황 때와 비슷하다고 경고해 충격을 줬다. 경제공황의 현실화 여부를 떠나 그가 ‘기술혁신’을 100년 전과 오늘날의 위기를 촉발한 유사점 중 하나로 본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혁신적인 기술은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는 핵심 요인이었고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기술혁명의 한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증기기관과 방직기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초의 산업국가로 만들었다. 영국은 식민지 확장을 통해 원자재를 확보하고 시장을 지배하는 동시에 자유무역을 세계 경제의 새 패러다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지배 없이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스페인이 주도하던 중상주의 세계 조류를 제국주의로 전환했다.

19세기 말 독일은 가솔린 엔진 발명을 위시해 화학·전기 분야에서 앞서가며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또한 국가 주도 금융·산업 연계 체제로 해외 인프라에 투자하고 식민지 원자재 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자국의 중화학공업을 완성해 갔다. 이런 독일의 전략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의해 모방됐고, 결과적으로 영국과 독일의 충돌, 그리고 일본의 야욕이 더해지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20세기 미국은 이동식 조립라인 기술 혁신으로 대량생산·소비에 기반한 경제 모델을 탄생시켰다. ‘포드주의’(Fordism)로 불린 이 모델은 미국을 전후 세계경제의 중심국으로 성장시켰다. 미국이 냉전 승리를 선언한 뒤에는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도 미국 모델을 따라 글로벌 시장의 통합으로 나아갔다. 국가의 역할보다 다국적 기업의 효율성이 강조됐고, 아웃소싱을 통한 글로벌 공급망이 구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빠르게 부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근에는 중국과 러시아 등 ‘글로벌 이스트’(권위주의 국가들)의 국제 질서 변경 시도로 세계는 다시 세력 범위 확장 경쟁에 빠지고 글로벌 경제는 후퇴일로다. 과연 세계 경제는 어디로 향하며 그 분기점은 무엇일까. 해답은 이런 지정학적 변화와 새로운 기술혁명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전환이 절묘하게도 동시에 진행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 디지털 전환(DX)과 에너지 전환은 물론 인공지능(AI) 기반 국방기술과 우주 관련 기술의 혁신은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특히 AI는 다른 분야 기술 개발을 가속할 뿐만 아니라 자기영속성을 갖춰 국가 간 힘의 균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다행히도 한국은 신기술의 핵심 국가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나 ‘글로벌 웨스트’(미국 등 서방세계)와 ‘글로벌 이스트’가 충돌하는 최일선에 자리하고 있고, 양측은 투자 인센티브와 상생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을 압박하며 첨단기술의 자국화를 꾀하고 있다.

이는 분명 한국에 위기지만 현재의 기술 전환 시점은 한국이 세계 경제에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다. 18~19세기 패러다임 전환기에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종주국이나 자본투자국에 원자재를 수출하는 수동적 교역 체제에 갇혀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은 고부가가치 기술 보유국으로서 전환기에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 대책에 매몰되지 않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구한말 한반도가 외세의 충돌 무대가 된 역사를 상기한다면, 핵심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공유를 차단하고 AI 등 뒤처진 분야에서의 추격을 위한 연구개발(R&D)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생존을 보장할 무기인 동시에 번영을 약속하는 지름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는 혁신 역량 제고를 위한 교육개혁 및 R&D 환경 개선과 아울러 중소기업의 DX 등 산업 생태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국제사회에서의 균형 잡힌 외교를 통해 기술 주권을 담대히 지켜나가야 한다. 이때 비로소 한국은 단순한 기술 보유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새 질서를 형성하는 주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기술 혁신이 가져온 위기와 기회를 어떻게 대응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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