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트로트 열풍이 분 지 5년이 됐다. 경영 악화에 시달려온 종합편성채널과 지상파, 그리고 코로나19 직격탄으로 시름하던 가요계는 간만에 탄생한 블루오션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방송사들은 비슷비슷한 트로트 오디션을 찍어냈고, 연예기획사들은 아이돌로 뛰던 10대까지 트로트로 전향시켰다. 재방, 삼방, 사방에 똑같은 출연자로 스핀오프 예능까지 쏟아냈으니 대중이 질리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물론 소수의 충성 고객이 매출을 받쳐주고 있지만 연령대가 조금만 내려가면 ‘트’ 자만 나와도 싫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트로트가 다음 전성기를 맞이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듯싶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것 아니라지만, 굳이 얘기를 꺼내 본 건 이런 일이 우리 콘텐츠산업에서 너무나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뭔가 하나 뜬다고 하면 너나없이 달려들어 골수까지 쪽쪽 뽑아먹다가 공멸하는 현상. 음악부터 패션, 식음료, 영화 등에 이르기까지 고질적인 리스크다.
트로트 말고 K팝 전체로 범위를 넓혀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국내 음반 판매량은 지난해 1억 장을 돌파했다. 기뻐할 일 같지만 상술이 만든 거품이라는 경고도 만만치 않다. 지금까진 팬들이 알면서도 당해줬지만 임계점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4대 기획사는 랜덤 포토카드와 팬미팅 응모권을 끼워넣어 앨범을 마치 ‘확률형 아이템’처럼 판다. 갓 데뷔한 한국 아이돌이 테일러 스위프트보다 앨범 판매량이 많은 기현상이 속출하는 배경이다. 민희진 씨는 “가수와 팬 모두에게 부담을 전가하고 주식 시장까지 교란하는 잘못된 관행”이라고 비판한 바 있는데, 민씨를 싫어하는 업계 인사조차 이 지적엔 고개를 끄덕인다.
K팝에 앞서 확률형 아이템으로 재미를 본 곳이 K게임이다. 유료 아이템 구매를 압박하는 수익 모델로 대성공을 거둔 리니지를 답습한 일명 ‘리니지라이크’ 게임이 판을 쳤다. 한동안 캐시 카우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독이 됐다. 매출만을 목표로 찍어낸 양산형 게임은 해외에서 안 먹힐뿐더러 국내 이용자도 이탈하게 했다. 젊은 층에서 엔씨소프트는 ‘개고기집’으로 불린다. 아저씨들한테나 팔리던 메뉴를 포기하지 못한 채 개고기 파스타, 개고기 탕후루 같은 괴상한 아류만 개발한다는 조롱의 표현이다.
K뷰티가 뜰 때 K패션이 도약하지 못한 원인도 반짝 트렌드에 영합하는 풍토와 무관치 않다. 모든 패션업체가 아웃도어로 ‘치킨 게임’을 벌이던 시절 섬유업계 원로 기업인들이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 좀 된다 싶으면 우르르 달려가고, 상황이 조금 바뀌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듯 빠져나간다.” “당장 매출 올리려고 연예인 마케팅에 골몰하는데, 의류업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느냐.” 해외 기업은 기술력과 브랜드 가치에 천착해 연구개발(R&D)을 놓지 않는데 우린 정반대라는 취지였다. 10년 전 들은 말인데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으로, 골프웨어로 우르르 몰려갔다가 이내 불어난 재고에 발목이 잡히는 식이다. 국내 패션 브랜드 매출 1위는 수년째 일본 유니클로의 차지다.
요즘 세계를 호령하던 글로벌 1등 업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 여기에는 인텔, 보잉, 스타벅스 등과 함께 나이키의 이름도 올라 있다. 주가가 반토막 나고,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되고, 기존에 발표한 실적 전망치까지 거둬들이는 등 이래저래 어수선한 상황이다. 나이키의 위기 원인으로 여러 분석이 따라붙지만 시발점은 우려먹기였다. 수년 동안 에어포스 1, 코르테즈 같은 인기 모델을 한정판으로 재탕하고 신제품 개발은 등한시한 사이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천하의 나이키도 빠지는 이런 패착, K콘텐츠 산업이 벌써부터 답습해선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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