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펠트호번의 ASML 캠퍼스 본사 1층에는 ASML이 지난 40년간 축적한 기술을 집약해 놓은 ‘익스피어리언스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방문한 이곳의 상당 부분은 세계에서 ASML만 제조할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핵심 부품을 전시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띈 건 독일 광학업체인 자이스가 만든 렌즈다. 빛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자이스의 렌즈는 ASML의 ‘High-NA EUV’가 탄생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부품이다. 이 렌즈 없이는 EUV 기술도 불가능하다. 빛을 쏘는 레이저 기계의 원천 기술도 독일 트럼프사(社)에서 가져왔다. 크리스토퍼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가 “ASML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생태계(eco-system)”라고 말한 이유다. 중국이 거의 모든 기술에서 미국을 따라잡았지만, 유독 ASML만은 모방하지 못하는 것은 일국(一國)을 넘어선 기술 협력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8대 공정 중 가장 중요한 노광은 광원(光源)을 쏴 웨이퍼에 설계 회로를 반복적으로 찍어내는 작업으로, 초미세 회로 구현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노광 기술 중 최첨단은 EUV다. ASML이 만들어내는 대당 수천억원의 노광 장비 High-NA EUV는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라는 별칭을 보유했을 정도로 대체재가 없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소버린 테크’다.
역설적이게도 한 나라의 주권을 지킬 정도로 중요한 기술이 나올 수 있던 건 다양한 기업과의 기술 협력 덕분이다. EUV 노광기는 물론 그보다 아래 단계인 심자외선(DUV) 노광기 제조에 협력하는 ASML의 파트너 회사는 5100곳이 넘는다. 국적과 학벌, 전공을 따지지 않는 인재 영입 전략도 ASML 협력 경영의 중요한 축이다. ASML 직원들의 출신 국가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까지 총 140개국에 이른다. 푸케 CEO는 “16개국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4만4000여 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며 “전공과 국적에 상관없이 다양한 인재 채용에 앞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ASML이 캠퍼스 확장을 꾀하는 이유는 미·중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도 EUV 기술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ASML은 R&D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2020년 22억유로이던 R&D 투자 규모는 지난해 40억유로로 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R&D 직원도 1만543명에서 1만5605명으로 50% 증가했다. 한국 미국 중국 대만이 ASML 장비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R&D에 있다.
펠트호번=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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