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달항아리를 그려온 최영욱의 미술 인생도 이런 덜어내기의 여정과 다름없다. 처음에 색을 비웠고, 그다음 백자의 주둥이를 걷어냈다. 최근에 이르러 달항아리 형태마저 없애고 있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신작 28점을 선보인 그는 “그동안 항아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명암과 묘사를 더 했는데 요즘은 군더더기를 빼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흰색만 남은 그의 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항아리 아래쪽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산세나 물결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자를 가마에 구우면서 발생했을 얼룩과 흑점은 밤하늘의 별빛과 닮았다. 미국 빌게이츠재단,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왕실 등이 얼핏 평범한 그의 정물화를 소장한 배경이다.
최 작가의 작업은 경기 파주시 작업실 인근 자연을 산책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튜디오로 돌아온 작가는 캔버스 위에 흰색 돌가루와 물감을 겹겹이 쌓는다. 표면을 사포질로 갈아내며 매끄러운 광을 내는 작업을 수십 번 반복한다. 그 결과 화면에서 2~3㎜가량 볼록 튀어나온 그의 달항아리는 감초 같은 입체감을 더한다.
그의 달항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천 갈래의 빙렬(氷裂)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빙렬은 도자기 표면에 바른 유약이 식으면서 생긴 실금이다. 작가는 이를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인생사에 비유했다. 달항아리 시리즈의 제목은 동양 철학에서 업보(業報)를 의미하는 ‘카르마’다.
200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간 최 작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국관에서 덩그러니 놓인 조선백자를 만났다. 쓸쓸한 느낌이 작가 자기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국보급 유물’ 정도의 고급 백자는 아니었지만, 고향을 떠나 우직하게 서 있는 자태에 반했다.
작가의 최근 작업은 세밀한 묘사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달항아리 모습을 극사실주의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 속에서 재구상한 추상에 가깝다는 얘기다. 전시는 10월 21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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