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국이던 한국은 불과 60여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 핵심 동력은 기업이다. 석유화학과 철강, 전자, 자동차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잇따라 탄생했고 그들이 구축한 생태계에서 일자리와 세금이 나와 경기 순환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한국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 환경은 최근 완전히 바뀌고 있다. 한국을 먹여 살려온 주력 산업은 하나둘 중국에 따라잡혔고, 미래 산업인 인공지능(AI), 로봇, 우주, 양자 등은 미국, 중국과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은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다. 석유화학 중심이던 SK그룹은 AI 전문 회사로 탈바꿈하고 있고, 현대자동차그룹은 로봇과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등으로 변화와 혁신에 ‘올인’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간 기준 사상 최대 연구개발(R&D)과 시설 투자를 단행했다. 특히 R&D 투자액 28조3400억원은 영업이익 6조5700억원의 네 배가 넘는 규모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에서 40개의 R&D센터를 운영하며 제품 기술 개발은 물론 미래 기술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 시장에서 리더십을 지킬 계획이다. 빠르게 성장할 AI, 고성능 컴퓨팅(HPC), 자동차 전장(전자장치) 관련 차세대 반도체 시장에서도 신제품을 출시해 ‘초격차’를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자동차에서 나아가 첨단 물류 시스템, 소프트웨어 중심의 대전환, AI와 로봇, AAM 등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게 수소 밸류체인 확보다. 현대차그룹은 수소 생산·저장·운송·활용 등 전(全) 주기에서 맞춤형 패키지를 설계하는 ‘HTWO 그리드(Grid) 솔루션’을 내놨다.
SK그룹은 AI 기업으로의 변화를 준비 중이다. ‘AI 반도체’로 불리는 HBM 등 하드웨어와 AI 핵심 인프라인 데이터센터, 개인 비서 등 AI 서비스를 아우르는 종합 AI 기업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SK그룹은 2028년까지 100조원 이상을 투입할 예정이다. AI 기업으로의 변신 선봉엔 SK하이닉스가 나선다. 5년 동안 103조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이 중 80%(82조원)를 HBM 등 AI 관련 사업에 투입한다. 여기에 미래 산업으로 키워온 친환경·화학·바이오사업 부문과 관련해 선택과 집중에 나선다.
LG그룹 역시 AI 분야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2020년 AI 싱크탱크인 LG AI 연구원을 설립한 데 이어 지난 8월엔 국내 최초로 오픈소스 방식의 ‘엑사원 3.0’을 공개했다. 한국형 AI 생태계 구축에 앞장서고, AI산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포석이다.
바이오와 클린테크 분야 육성에도 힘을 싣고 있다. LG의 바이오 사업을 이끄는 LG화학 생명과학본부는 지난해 사상 최초로 연 매출 1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클린테크 분야에선 바이오 소재, 신재생에너지 산업소재, 폐배터리 재활용, 전기차 충전 사업 등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혁신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정부도 손 놓고 있어선 안 된다. 기업이 마음껏 도전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혁신의 장’을 만들어줘야 한다. 미래 기술을 우리 기업이 선점할 수 있도록 R&D를 지원하고 정책자금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정부 지원도 중요하다. 국내 기업은 과도한 규제 탓에 투자와 경영에 큰 부담을 안고 있다. 특히 노동, 안전, 환경, 공정거래 분야 등의 규제가 산재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규제를 없애고 재설계해 기업의 투자와 경영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와 여전히 높은 상속세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 경제를 이끈 기업가정신도 되살려야 한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산업이 대한민국 경제의 주축이 된 건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고 도전한 기업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가 두려워 신사업 진출을 꺼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실패해도 일어나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업가 DNA’를 일깨워야 한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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