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출 비용만 1조'…EU 무역장벽에 한국 '초비상'

입력 2024-10-09 18:00   수정 2024-10-09 18:17



유럽연합(EU)이 2026년부터 디지털제품여권(DPP) 의무화라는 강도 높은 무역 규제를 실시함에 따라 우리 기업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1조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기업의 비용을 줄이고, 우리 산업의 데이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인 산업 데이터 플랫폼을 만들기로 했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17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주재로 산업디지털전환위원회를 열어 한국형 산업 데이터 플랫폼의 구축 작업에 공식 착수한다. 이에 앞서 14일에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한·독 산업데이터 플랫폼 협력 포럼’을 열어 선두 주자인 독일의 개발 노하우를 청취하고, 한국형 플랫폼 구축 방안을 논의한다.

정부는 산업부 중소기업벤처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환경부 관련 부처로 구성된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를 통해 독일과 일본에 뒤진 산업 데이터 플랫폼을 따라잡는데 총력전을 펼칠 방침이다.
막 오른 산업데이터 플랫폼 경쟁


산업 데이터 플랫폼은 기업간 수주·발주, 공장 가동상황, 사물인터넷( IoT) 등 제조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업간 거래(B2B) 데이터가 몰리는 허브다. 스마트폰, SNS, 전자상거래 등에서 생겨나는 소비자 데이터(B2C)와 차이가 있다.

소비자 데이터 확보 경쟁은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가 독점 체제를 굳히고 있지만 전체 데이터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산업 데이터의 몫이다. 신재생 에너지와 자율주행 차량의 보급으로 산업 데이터 발생량은 급증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산업 데이터 플랫폼 구축은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 독점에 맞설 최후의 기회로 평가된다.

미국 일본 중국 EU 등 주요 제조국들이 독자적인 산업 데이터 플랫폼을 만들어 시장을 선점하려는 이유다. 플랫폼 구축은 널리 통용되는 규격을 먼저 표준화하는 싸움이어서 주요국들은 자국의 공식 표준(de jure)을 국제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가장 먼저 산업 데이터 플랫폼 구축에 성공한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10여년간 약 5000억원을 투자해 2021년 독자 플랫폼인 ‘카테나X’를 출범시켰다. 유럽의 제조강국인 프랑스와 스웨덴 등을 참여시켜 카테나X를 EU에서 통용되는 플랫폼으로 성장시켰다. EU는 카테나X의 지위를 ‘산업 데이터 시장의 GAFA’로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 자동차 업계와 현대자동차 등에도 참여를 제안했다.

일본은 카테나X 참여하는 대신 독자 플랫폼 ‘우라노스에코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라노스에는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자동차 ‘빅3’, 도요타와 파나소닉의 합작 전기차 배터리 회사인 프라임플래닛에너지&솔루션, 덴소 등 일본의 자동차 배터리 관련 기업 50여곳이 참가해 유력한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결국 EU는 일본을 자국 플랫폼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동등한 산업 데이터 플랫폼으로 인정하고 지난 2월22일 정보공유와 상호인증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카테나X와 우라노스가 자신의 DPP를 서로 인증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일본은 EU의 DPP 장벽을 넘을 수 있게 됐다.

독일과 일본은 자동차와 배터리 부문에서 먼저 시작한 ‘카테나X-우라노스 연합’ 플랫폼을 모든 제조업 영역으로 넓힌다는 목표다. 중국도 조만간 자체 산업 데이터 플랫폼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日·EU 연합..韓 "데이터주권 지켜라"

EU는 산업 데이터 플랫폼을 무역장벽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2023년 7월 EU 의회는 2026년부터 교역 상대국에 카테나X가 인증한 디지털제품여권(DPP)을 의무화할 방침이다. DPP에는 원료·부품 정보, 수리 용이성, 탄소발자국(제품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표시), 재생원료 함량, 희소금속 재활용 방안 등 제품 공급망 전 과정의 데이터를 담아야 한다.

별다른 대비가 없으면 우리나라 제조업체가 4대 교역상대국인 EU에 제품을 수출할 때 카테나X를 이용해야 한다. 산업부와 업계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이 카테나X 사용료로 매년 1조원 이상을 물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EU 수출 규모(약 92조원)의 1%에 달하는 액수다.

그동안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은 산업 데이터 플랫폼 구축에 소극적이었다. 기업 비밀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EU의 DPP 무역 장벽이 눈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상황의 심각성에 눈을 떴다.

EU는 지난해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 682억달러(약 92조원)가 팔린 4대 수출 시장이다. EU 무역 장벽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는 섬유 배터리 전기·전자 업계가 정부에 ‘SOS’를 치면서 플랫폼 구축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정부는 올해 초기 예산으로 35억원을 배정하고 플랫폼 설계 개발을 시작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독자적인 플랫폼이 없으면 데이터 주권을 빼앗겨 독일이 국제 표준을 바꾸거나 카테나X 사용료를 올릴 때마다 끌려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벤치마크 대상은 일본이다. 일본처럼 독자적 플랫폼을 만든 뒤 EU, 일본과 상호 인증 협약을 맺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과제도 만만찮다. 독일 일본과 플랫폼 연합을 결성하려면 이 국가들로부터 상호인증을 맺을 만한 상대로 인정 받아야 한다.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한 한국형 플랫폼을 독일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EU의 무역장벽을 넘는 일도 벅차다. EU는 교역상대국에 DPP 제출을 2026년부터 의무화할 방침이지만 우리는 2027년에야 DPP의 하위 인증인 배터리제품여권(BPP) 플랫폼을 출범 시킨다는 목표다.

이정준 서울대 객원교수는 “플랫폼 개발기간을 고려할 때 2027년 출범도 빠듯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우리에게는 독일과 일본에 부족한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이 있기 때문에 한국형 플랫폼의 경쟁력은 충분하다”며 “정부 역량을 총동원해 플랫폼 구축을 서두를 것”이라고 말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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