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아픔 담긴 스무 살 쇼팽의 시, 백건우가 다시 읊다

입력 2024-10-09 17:20   수정 2024-10-10 00:23


“12세 무렵 서울 옛 원각사에서 처음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어요. 그때는 너무 어렵게 이 곡을 친 것 같아요. 물론 그 후에도 여러 번 연주한 곡이지만, 이번 공연에서 다시 한번 제대로 소리를 전해보고자 합니다.”

일평생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온 피아니스트 백건우(78)는 “아무리 여러 번 연주해도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 빚을 진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 독학으로 무수한 곡을 섭렵한 신동이었지만 깊은 고민 없이 수행했던 작품들을 지금까지도 다시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게 그의 일상이기 때문일까.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경아르떼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그를 9일 서울 서초동 씨앤엠문화재단 대주아트홀에서 만났다. 백건우의 쇼팽은 이미 음반으로 정평이 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날 백건우는 연필을 들고 수없이 마주했을 쇼팽의 악보를 진지하게 정독했다. 피아노 소리가 연습실 바깥으로 들려온 건 한참 뒤였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곡가의 곡답게 관현악보다 피아노의 색채가 두드러진다. 스무 살 무렵 짝사랑이 끝난 아픔을 쇼팽이 음악으로 승화한 곡인데, 건반 위의 구도자가 읊어낼 피아노의 시(詩)여서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주는 음악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지, 완성됐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연주 자체도 움직이는 것이니 연주자에게는 항상 새로운 경험이 되지요.” 그는 아직도 자신이 작곡가의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고 있는지를 고민한다. “예전에는 내가 음악가를 대변한다는 느낌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연주를 했다면, 이제는 그러지 않아요. 오로지 내가 그 작곡가의 소리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에 집중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제가 묻어 나오거든요.”

연주회를 대하는 태도도 젊은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연주회를 앞두고 공연 당일까지 불안했지만 지금은 음악을 탐구하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무대에 오른다고. “음악과 연주가 제 삶의 연속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기에 공연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아요. 물론 적당한 긴장은 지금도 하는데, 예전에는 끝없이 불안해했다면 지금은 작곡가의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긴장감의 종류가 바뀌었습니다.”

11일 백건우와의 협연에 이어 한경아르떼필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을 들려준다. 체코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작곡가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가득 담아 작곡한 곡. 10대에 뉴욕에서 유학했던 백건우의 모습이 겹친다.

“드보르자크는 음악가로서 원숙한 상태에서 이주한 것이고, 나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인생이어서 조금 달라요. 하지만 음악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새로운 환경이 뉴욕이니, 어느 정도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오는 11월 6일에는 백건우가 모차르트 곡을 녹음한 두 번째 음반이 세상에 나온다. 지난 5월 첫 번째로 발매한 모차르트 시리즈의 연작이다. 내년 3월 세 번째 음반까지 녹음이 예정돼 있다.

백건우는 “모차르트의 곡이야말로 일생을 함께 보낸 음악인데, 모차르트의 소리가 대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계속하면서 음반을 이제야 녹음한 거예요. 모차르트 음악만의 소리가 있거든요. 그걸 전달하고 싶어서요.”

첫 번째 모차르트 앨범과 같이, 두 번째 앨범 표지에도 경기 용인의 초등생 이진형 군(9)의 그림이 실린다. 백건우는 “첫 번째 그림에서는 제 얼굴이 정면을 바라보는데 빨강색의 밑그림 덕에 강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으로 표현이 됐죠. 그런데 두 번째 그림에서는 진형이가 파랑색을 많이 썼어요. 심연, 수심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 그림이어서 놀라웠어요.”

그는 진형군의 예술가적 기질도 다시금 느꼈다고 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걸 깨닫고 발전시키려는 모습이 예술가에게 있는데, 진형이가 그런 부분이 많다는 걸 그림으로 또 한번 알게 됐어요.”

백건우는 마지막 모차르트 앨범까지 진형이가 그려줬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지만 이는 전적으로 아이에게 달린 일이라고 했다.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해달라는 제안에 건반 위의 구도자는 촬영을 완곡히 거절했다.

“제가 피아노 앞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수십 년 동안 그런 클리셰로 비친 걸 끊고 싶어요. 저는 음악 때문에 나 자신과 싸우고, 고뇌하는 사람으로 남는 거면 족해요.”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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