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대세 된다고? '국뽕이 과하다' 생각했는데 놀랍다"

입력 2024-10-10 15:59   수정 2024-10-10 16:57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영광은 저문 지 오래지만, 미술 분야에서만큼은 영국이 여전히 초강대국이다. 고흐와 모네를 비롯한 수많은 서양미술 거장들의 작품과 데이미언 허스트·트레이시 에민 등 현대미술 스타들이 공존하는 문화 강국이자, 미국에 이은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2위(2023년 기준)를 지키는 거대 시장이라서다. 그 중심에 런던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규모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이 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장터지만 이곳은 세계 미술계의 대세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장(場)으로 평가받는다. 최대 수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릿값을 내고 참전하는 갤러리들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엔 냉정한 수요·공급의 논리만 있을 뿐, 인종·애국심·각국 정부의 문화 정책과 지원 등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지난 9일 전세계 VIP를 상대로 개막한 올해 프리즈 런던 행사에 방문한 국내 미술계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년에 비해 한국 작가 작품의 수와 비중이 확연히 급증했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 미술이 대세가 될 거란 얘기를 들을 때마다 ‘국뽕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게 되니 정말 놀랍다”고 했다.

“한국 작가가 팔린다”

이날 프리즈 런던에서 찾은 영국 갤러리 로빌란트 보에나의 부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취급하기로 유명한 이 갤러리는 프란시스코 고야, 에드가 드가를 비롯해 미술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거장들의 작품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 작품들 가운데에 이배 작가의 대작 ‘불로부터’가 있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이배 작가가 워낙 인기가 많은데다 작품의 수준과 분위기가 명작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해 좋은 자리에 걸었다”고 말했다.



올해 행사에서는 한국 작가 작품을 들고 나온 해외 화랑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미국 뉴욕 기반의 갤러리 리만머핀은 한국 조각가 김윤신(89)의 작품으로만 부스를 채웠다. 스코틀랜드의 갤러리 더 모던 인스티튜는 김보희 작가(72)의 작품을, 뉴욕의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는 이강승 작가(46)의 작품을 들고 나왔다.

글로벌 미술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작가 작품을 들고 나온 국내 갤러리들의 판매 성적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국제갤러리는 개막 직후 약 8억원에 하종현(89)의 작품 ‘접합’을, 약 1억6000만원에 양혜규(53)의 조각 작품을 판매했다. 학고재갤러리는 윤석남(85)작가의 작품을, 가나아트는 김구림(88)의 작품을 판매했다. 이배 작가의 작품을 들고 나온 조현화랑은 이배의 조각 작품을 약 2억7000만원에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

런던 각지 수놓은 한국 작가들

아트페어장 바깥에서도 한국 미술의 존재감은 컸다. 세계 최대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 런던 최고의 현대미술관 중 하나인 헤이워드갤러리가 한국 작가들에 안방을 내줬다. 양혜규는 헤이워드갤러리 전시 공간을 전부 사용해 자신이 이때까지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전시 ‘윤년’을 열었고, 이미래(37)는 테이트모던을 대표하는 높이 35m, 넓이 3300㎡(약 998평)의 전시공간 ‘터빈홀’을 압도적인 규모의 대형 설치작품으로 채웠다.




설치예술가 정금형(44)은 런던현대미술관(ICA)에서, 건축가 조민석(58)은 하이드 파크의 미술관인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건축전을 열고 있다. 정희민 작가(38)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문 화랑인 타데우스 로팍의 런던 지점에서, 유귀미 작가(39)는 알민 레쉬 갤러리 런던 지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용선 작가(73)는 크롬웰 플레이스에서, 이은실 작가(41)는 프리즈 런던 측에서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같은 동시다발적인 전시는 한국 정부의 지원이나 개입, 각 미술관·화랑들의 사전 논의 없이 벌어진 우연의 일치다. 그만큼 의미가 크다. 세계 미술계에서 힘 있는 미술관과 화랑 관계자들이 프리즈 런던 기간을 맞아 런던을 찾는 전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보여줄 ‘얼굴’로 한국 작가를 택했다는 이유에서다. 정도련 홍콩 M+미술관 부관장은 “그 어느때보다도 한국 작가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해”라고 말했다.

런던=성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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