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롭지만 꿋꿋이…여성의 아픔을 쌓다

입력 2024-10-10 18:16   수정 2024-10-11 00:39


자식을 둔 부모라면 안다.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창자가 끊어진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뜻에서 단장지애(斷腸之哀)로도 불린다.

영국 작가 애니 모리스(46)의 조각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크고 작은 구체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모습은 절단된 창자와도 닮았다. 하지만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자식을 유산한 어미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작가의 ‘스택(Stack)’ 시리즈 이야기다.

모리스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의 대표작인 스택 연작부터 두 점의 ‘꽃 여인’ 조각, 그리고 태피스트리 작품까지 폭넓게 전시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국에서 여는 첫 개인전인 만큼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항상 작품에 둘러싸여 작업하는 영국의 스튜디오를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해외 미술계에서 그는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니키 드 생팔(1930~2002) 등 여성주의 작가들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루이비통 재단, 미국 뉴욕 티시 컬렉션, 중국 상하이 룽 미술관 등 이름난 기관들의 소장품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현재 그의 스택 시리즈는 3억~4억원대에 거래된다.

전시된 작품은 10점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만큼 작품 하나하나를 밀도 있게 감상하기 좋다. 어릴 적 작가의 모친에 대한 기억부터 작가 본인이 어머니가 되기까지 3대(代)의 기록을 한 공간에 펼쳐놓았다.

모리스의 이야기는 1978년 영국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어려서 부모의 이혼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떠나는 과정에서 여러 숨겨진 비밀과 거짓말이 드러났다”며 “꽃처럼 어여쁘던 어머니가 서서히 시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두 점의 ‘꽃 여인’ 조각은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배가 불룩 나온 여인의 나체 형상인데, 머리 부분을 한 송이의 꽃으로 대체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잠깐 만개한 꽃이 생명을 잃고 사라지는 모습을 어머니의 삶에 비유했다.

불행은 연거푸 찾아왔다. 세월이 흘러 작가 본인이 어머니가 될 차례였다. 자신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아이와의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출산 직전인 임신 8~9개월 차에 아이를 유산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유산의 트라우마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때의 상처를 딛고 2014년부터 몰두한 작업이 스택 시리즈다. 석고와 모래로 만든 불규칙한 모양의 공을 밝은 색조로 칠하고, 강철 기둥과 콘크리트로 조각을 지탱했다. 임신 중 배가 불룩 나오는 과정과도 닮은 모양새다. 현실의 물리법칙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꿋꿋이 서 있는 작가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업이다.

전시장에는 크기가 서로 다른 스택 조각이 여러 점 설치됐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각 구체에는 어두운 색조가 아니라 파랑과 초록, 노랑 등 밝은색을 칠했다. 역설적으로 작가는 본인의 작업을 두고 ‘기쁨 쌓기(Stacks of Joy)’라고 부른다.

“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과거의 상처에 갇혀 그대로 살아가거나, 과거를 바탕으로 삶을 새롭게 바라보거나. 그때의 일들이 저한테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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