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중요한 건 성과야" [더 머니이스트-이윤학의 일의 기술]

입력 2024-10-15 06:30   수정 2024-10-15 10:47


‘근태(勤怠)’ : 부지런함과 게으름. 또는 출근과 결근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근태’의 정의입니다. 간혹 근태(勤怠)를 근무태도(勤務態度)의 줄임말로 착각하는 분들이 계신 데, 그런 의미가 아니지요. 학교 다닐 때 받은 상이라고는 개근상이 전부인 저에게, 근태의 의미는 친숙합니다만 단어 자체는 사실 회사 생활하면서 처음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결석하지 않고, 아무리 아파도 악착같이 학교에 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모님이 억지로라도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게 도리이자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건진 게 개근상이었지요.

회사 생활도 그렇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근태의 핵심은 지각없이 정시에 출근하고 퇴근도 정해진 시간에 하며, 결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증권회사 신입 사원 시절, 지점 막내였던 저는 지점의 현관 열쇠를 갖고 있어 가장 먼저 출근해서 지점 문을 열고 업무 준비를 했습니다. 그게 지점에서 제가 맡은 첫 임무였습니다. 다음은 생수통을 교체하는 일이었습니다. 무거운 대형 생수통을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낑낑대며 생수기에 뒤집어 올리는 고난도(?)의 일이었습니다. 그다음 업무는 서류를 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류 복사를 많이 하다 보니 복사기가 자주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복사기 수리도 제 업무가 되었지요. 지금도 고장 난 복사기는 제가 잘 고칩니다. 과거엔 이처럼 정확한 출퇴근, 성실한 태도를 기준으로 업무를 평가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내세운 구호입니다. 걸프전의 영향으로 지지율이 높았던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과 달리, 클린턴 후보는 심각했던 경제 불황 문제를 상기시키며 유권자들에게 오히려 경제를 직시하라는 메시지로 던진 말입니다. 결국 현실적인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뽑았지요. 저는 이것을 "바보야, 중요한 건 성과야(It's the performance, stupid)”로 바꾸어 말하려 합니다.

고대부터 일은 노예의 몫이었습니다. 노예를 통제하는 방법은 질(Quality)이 아니라 양(Quantity)이었죠. 오늘의 일할 양은 얼마이고, 언제까지 일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근대 애덤 스미스의 분업 이론 또한 핀 제조 공장에서 과정을 세분화해 핀의 생산량을 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양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양보다 질이 중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보화 사회를 지나 AI가 등장하는 4차 산업 혁명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서 근태의 개념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업이 근태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고, 많은 사람이 근태를 회사생활에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게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물론 지각과 결근을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제는 근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성과입니다. 저는 ‘열심히 하는 것’ 이상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사업전략본부에서 일할 때입니다. 국내 최초로 해외 주식 투자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을 무렵입니다. 어느 날 회사 경비 아저씨가 제게 귀띔을 해줍니다.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이 우리 부서에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게 누군지 대번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다 며칠 뒤, 급한 업무가 있어 새벽 6시쯤 일찍 출근하다가 그 직원이 회사 앞 한 승용차에서 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아버지인 듯한 분이 운전으로 바래다준 것 같았습니다. 정해진 출근 시간이 8시였으니, 거의 두 시간 일찍 온 겁니다. 이 친구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본인의 PC는 물론 전 직원의 PC를 켰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회사 구내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합니다. 그제야 회사 구내식당에서 이 친구에게 사은품을 줬던 것이 기억났지요. 전체 회사직원 중 구내식당을 가장 자주 이용하는 직원으로 이 친구가 뽑혔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친구는 거의 매일 아침, 점심은 물론 저녁 식사까지 회사 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신입 사원임에도 매일 야근했기 때문이지요.

한참을 고민하다 이 친구를 따로 불렀습니다. 출근을 몇 시에 하는지, 출근길 교통편은 무엇을 이용하는지, 왜 직원들의 PC를 아침마다 켜주는지, 요즘 힘든 일이 무엇인지, 일주일에 야근은 며칠 하는지, 퇴근은 무슨 일 때문에 늦게 하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그 직원 말로는 거의 매일 아침 6시 무렵에 아버지가 차로 태워 주셔 출근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근태가 중요하다며 신입 사원 시절엔 일찍 출근해 선배들에게 칭찬받아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전 직원의 PC를 켜는 것은 신입 사원 지점 연수 때 선배들이 그리하라고 가르쳐 주었답니다. 그래야 선배들의 귀염을 받는다고. 특별히 일이 힘든 것은 없지만 낮에 일을 쉬엄쉬엄하다 보면 저녁 늦게까지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야근으로 이어진다 했습니다.

저는 차근차근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회사에 바래다주는 것보다, 직접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하는 건 어때? 그리고 요즘엔 꼭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고 칭찬을 받는 건 아니야. 아버님께도 잘 말씀을 드리면 좋겠어. 그리고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게 네 성실을 증명하는 수단은 될 수 없어. 오히려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어. 그리고 PC는 개인 사무기기기도 하고, 미리 PC를 켜 두라는 것은 출근을 일찍 한 것처럼 보이려고 선배들이 시켜오던 좋지 않은 관습이야. 다른 사람 PC엔 손을 대지 않는 게 좋겠어.” 바로 그다음 날부터 그 직원은 정시 출근해 업무 시간에 최대한 일을 처리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회사 식당엔 점심시간에만 이용하는 불량 고객이 되었지요.

성과는 근태로 체크하지 않습니다. 근태는 회사생활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규칙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평가받긴 어렵습니다. 근태를 지키지 못하면 페널티이지만, 근태를 잘한다고 공식적인 어드밴티지는 없지요. 그러니 근태는 잘해야 본전인 셈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시되는 사회이지만, 잘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하겠다는 결의에 찬 인사말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이윤학 전 BNK 자산운용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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