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 요즘 뭐하나 했더니…영화 촬영도 접고 '깜짝 변신'

입력 2024-10-16 17:42   수정 2024-10-16 17:55



'남자의 변신은 무죄'

지금 배우 하정우를 가장 잘 대변하는 문장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연기로 대중들을 만나 온 하정우는 2010년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캔버스 위에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며 또 다른 관객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베테랑 연기자이지만, 작가로서는 아직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은 신인이다. 10월, 하정우가 자신의 새로운 작품들을 선보이러 삼청동을 찾았다. ‘전통의 강호‘로 여겨지는 국내 대표 갤러리 학고재와 손잡으면서다.



하정우는 올해 연기 활동을 쉬면서까지 미술 작업에만 몰두했다. 정신과 육체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화계, 연예계 관계자들이 '하정우 요즘 뭐 하고 사냐'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작업실과 집만 왕복했다. 특히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루틴’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9시부터 6시까지 마치 출퇴근하듯 작업 시간을 지켰다.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면서는 절대 지킬 수 없는 생활 패턴이다.

이번 전시는 학고재의 문을 열자마자 그의 200호짜리 대형 그림이 관객을 반긴다. 이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리는 건 그의 작업 인생 처음이다. 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선과 문양들로 빼곡하다. 모든 선은 뭉툭하지 않고 날카롭다. 이 날카로움과 세밀함을 구현해내기 위해 하정우는 수많은 재료 실험을 했다.

물감이나 아크릴 마커, 오일 마커는 그가 원하는 세밀함을 표현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문구점에서 유성마커 '샤피'를 발견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집도할 때 쓸 만큼 가늘고 세밀한 펜촉에 꽂혀버린 그는 광활한 캔버스의 선을 모두 이 펜으로 채워넣었다. 다른 데 눈길을 돌리지 않고 오직 작업에만 매달린 덕에 완성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주면 충분했다.



이렇듯 이번 전시에 나온 하정우의 회화는 패턴과 문양으로 가득하다. 카펫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카펫’ 연작은 그가 촬영을 위해 모로코에서 5개월간 머물 당시 마주쳤던 문양에 마음을 뺏겨 그림으로 옮겨왔다. 자신만의 패턴을 창조하기 위해 오랜 실험을 거쳤다. 캔버스에 도자기를 그린 후 그 위에 문양과 패턴을 채운 작품도 나왔다. 패턴뿐만 아니라 축구선수들의 얼굴을 본딴 캐리커쳐, 현대적인 문양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카펫 시리즈와 함께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연작은 ‘탈‘ 시리즈다. 타인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가 마치 탈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영감을 얻었다. 연기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스스로와 맞지 않는 탈을 쓰고 살아간다는 인지적 충돌을 표현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학고재의 갤러리 이미지와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 서양의 가면 대신 한국의 탈을 선택했다.

하정우는 아이러니하게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림을 시작했다. 20대 중반 ‘선택받아야만 일할 수 있다’는 불안은 그를 옭아맸다. 아무런 지식도 없던 그는 무작정 문구점부터 찾아갔다. 남들이 모두 쓴다는 수채화 물감과 4B연필을 사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시작한 어려운 그림은 그에게 위로가 됐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2013년 영화 ‘허삼관‘ 연출과 촬영을 동시에 하며 극심한 불안에 시달릴 때 전남 순천의 숙소 벽에 캔버스 천을 걸어놓고 밤마다 하염없이 선과 그림을 채워넣었다. 전시 오프닝에서 하정우는 “2010년 첫 개인전을 시작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직업적으로 큰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다”며 “그림은 나에게 직업적인 성취가 아닌 개인적 감정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 유명한 작가의 화집을 수없이 모으기도 했다. 그 때 그의 인생에 다가온 존재가 바로 장 미쉘 바스키아와 파블로 피카소다. 바스키아와 피카소의 화풍이 그의 그림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도 모두 이러한 경험 때문이다. 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며 유화의 세계를 알게 되고, 인물을 그리는 특별한 방식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카펫 시리즈와 탈 연작에서도 모두 바스키아와 피카소를 연상케 하는 구조와 구성을 느껴볼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 ‘네버 텔 애니바디 아웃사이드 더 패밀리(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도 그의 새로운 다짐을 담았다. '가족 외의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라'는 뜻을 가진 이 문장은 하정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대부'의 명대사다. 10년 넘게 그림을 그리면서도 한 번도 관객을 직접 대면하고 예술 세계를 이야기한 적 없던 스스로가 이 대사와 닮아 있다 느꼈다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스스로가 정한 한계점을 탈피하고 싶다는 다짐을 하며 제목을 지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그림들은 기존 하정우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정보가 없이 본다면 같은 작가의 작업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을 정도다. 기존에는 주변인과 타인들의 얼굴을 그린 인물화를 주로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인물화보다 패턴이나 추상적 표현에 집중한 것이다. 배경을 삭제하고 단순화했던 과거작과 달리 배경의 디테일을 신경쓰기도 했다.

하정우는 이런 파격적 변화를 택한 계기에 대해 묻자 “다른 작가들에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역마살 때문이지 않을까”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경험인 모로코 생활도 배우로서의 삶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풍의 변신이 변화보다는 진화라고 여긴다”고 자신했다.



하정우는 '전업작가가 아니다'라는 지점에서 오는 부정적 시각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가로서 인정받는 건 현재 나에겐 큰 의미가 아니다"라며 "지금 조금씩 깊이를 쌓아가면 언젠가는 무슨 평가든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가에 귀 기울이는 대신 그는 매 순간 '만 시간의 법칙'을 떠올린다고 했다. 1만 시간 노력하면 무엇이든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법칙을 떠올리며 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 하정우가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두고 '아이를 낳는다'는 표현을 쓴 이유다.

학고재와 하정우의 만남은 미술계에 큰 이슈로 다가왔다. 학고재는 윤석남, 백남준 등 ‘정통파 작가‘들을 꾸준히 조명해 온 갤러리기 때문이다. 상업화랑으로서는 처음으로 민중미술 작가들을 조명한 곳도 학고재다. '학고 시인'이라는 갤러리 별명이 붙여진 이유다. 그런 학고재가 왜 하정우의 작품세계로 눈을 돌리는 파격적 시도를 하게 되었을까. 그 답은 우찬규 학고재 회장이 우연히 만나게 된 해외 컬렉터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홍콩 아트바젤에서 한 큐레이터가 "미술 전문가 말고, 송강호나 BTS에게 전시평을 맡기면 어떠냐"는 제안을 한 것. 당시 우 회장은 '이제 미술의 지평이 넓어질 때다'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하정우처럼 '정통 작가'의 길을 걷지 않은 작가가 주목받을수록 더욱 한국 미술의 파급력이 커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우 회장은 "문학과 대중문화 음악은 이미 세계 정상이고, 이어서 미술이 그 계보를 이어갈 때가 됐다"며 "그렇게 되려면 새로운 영역의 작가가 탄생해야 하는데, 하정우는 그 새 바람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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