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긴 글이 팔리고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출판계에는 역대급 호황이 찾아왔다.
대표작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 작가의 책들은 10월 10일 수상 발표 이후 엿새 만에 100만 부 넘게 팔렸다. 출판 부수가 감소하면서 힘겨운 시간을 겪은 인쇄소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고 명품매장 대신 서점 앞에 오픈런이 늘어섰다.
출판유통통합전산망에 따르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10일부터 6일간 종이책은 248만2904부 팔렸다. 직전 6일 대비 약 80% 증가한 수치다. 금액으로 치면 255억원에서 392억원으로 53.7% 늘었다.
긴 글 뒤에는 ‘주의’ 표시가 따라붙고 학생과 성인의 문해력이 동시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독서열풍을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다. 지지부진하던 출판주와 제지업체 주가가 뛰었고 서점도 모처럼 호황을 맞았다.
전문가들은 한강으로 인해 폭발한 독서열풍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가 독서라는 아날로그에 매료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글과 짧은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깊이 있는 문장과 읽기 행위는 ‘과시’의 지위까지 얻었다. 숏폼의 시대에 긴 글이 팔리는 이유를 살펴봤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전 세계 서점가가 바쁘게 움직였다. 영국 런던 최대 서점 ‘포일스’엔 한강 특별 코너가 마련됐다.
프랑스 4대 문학상인 메디치상을 받은 프랑스판 ‘작별하지 않는다’도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 현지 출판사가 8000부 추가 인쇄를 긴급 주문할 정도다.
일본 대형 서점 기노쿠니야 도쿄 본점 2층 문학코너에도 한강 작가 특별 코너가 마련됐다. 아마존재팬 온라인에는 소설 ‘흰’ 일본어 번역본이 베스트셀러 2위까지 올랐다. 라쿠텐북스에서도 소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번역본이 나란히 외국 소설 코너 판매량 1~3위를 차지했다.
외신은 K-컬처 열풍이 한국문학으로 확대됐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한강의 놀라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K팝과 K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으로 상징되는 K컬처가 K문학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의 AFP통신은 “오스카에 이어 TV 드라마와 K팝 스타들이 세계시장을 점령했고 이제는 노벨문학상마저 가져갔다”며 “한국이 세계 문화 속 메이저로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언론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사실을 연일 비중 있게 조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그동안 한국 문화와 콘텐츠의 힘이 축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국제적으로 권위를 갖는 시상은 해당 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나오기 힘들다”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한국 콘텐츠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상이 가진 여러 가지 함의가 작품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BTS, 블랙핑크 등 K팝 열풍과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영상 콘텐츠의 영향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나스닥에 상장된 외국어 학습 플랫폼 듀오링고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한국어 학습자 수는 1770만 명으로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영어가 모국어인 이용자를 기준으로 했다.
한글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2년 전 조사 당시 한국어 학습자 수는 906만 명이었지만 올해 1770만 명으로 95% 성장했다. 영국에서는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이 급증하면서 교육 당국이 옥스퍼드대와 함께 그 이유를 연구하기로 했다.
한국어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원천이 된 한국문학의 서사와 구조가 ‘주류’ 반열에 올라섰다는 분석도 있다.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이 세계 문학의 수용자에서 전파자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그동안 한국문학이 드라마와 영화, 음악 등 K콘텐츠의 원천 소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장벽이 높은 문학까지 수면 위로 올라와 전파자로서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과 상실, 급격한 성장과 양극화 등 격동기를 거친 한국사는 문학적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AFP통신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류를 조망하며 “한국전쟁 이후 격동의 근대사를 거치며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토양이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출판업계에서는 한강 작가 열풍 이전부터 책 읽는 문화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 이어지는 골목 상권에는 늘 작은 책방이 있었고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20대가 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들어 10월 14일까지 2030 세대의 문학 도서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2% 뛰었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요 고객도 2030이었다. 전체 관람객 중 20대가 45%, 30대가 28%를 차지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독서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올해 초 영국 매체 가디언은 ‘독서는 섹시해(Reading is Sexy)’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자국 내 1020세대 사이에서 불고 있는 ‘종이책 읽기 열풍’을 조명한 기사다. 세계적인 모델 카이아 거버가 최근 독서클럽을 만들면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고 말한 인터뷰를 인용했다. 지난해 영국 책 판매량은 역대 최고 수준인 6억6900만 권을 기록했다.
한국에 ‘긴글 주의’가 있다면 영어권에는 ‘TL, DR’(Too Long, Didn’t Read: 너무 길어서 안 읽는다)이 있다. 온라인에서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표현이다.
하지만 최근엔 이와 대척점에 선 신조어가 등장했다.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개성 있고 쿨하다는 뜻의 ‘힙’을 합성한, 이른바 ‘텍스트힙(Text hip)’이다. 읽고 기록하는 것을 멋있다고 여기는 문화다.
정덕현 평론가는 “1020세대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며 “힙의 선상에 텍스트가 들어간 것은 오히려 책을 읽는 행위가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고 디지털 시대에 살다보니 아날로그와 오프라인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에서도 이런 성향이 드러난다. 1020세대가 주로 쓰는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는 텍스트힙 열풍에 따라 독서 관련 상품 검색량이 최대 28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지그재그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독서 관련 검색량을 조사한 결과 ‘북커버’ 검색량이 전년 동기 대비 28배(2700%)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커버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책을 꾸밀 수 있고 책의 표지를 감춰 취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제품이다.
같은 기간 북마크와 책갈피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500%, 396% 증가했다. 지그재그 관계자는 “자신의 스타일을 반영해 책을 꾸미는 독서 커스터마이징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며 “가방에 키링을 달 듯 책에는 북마크와 책갈피를 활용해 개성을 반영하는 1030 여성이 증가하면서 금속, 우드, 매듭 등 다양한 종류의 북마크와 책갈피가 판매됐다”고 말했다.
패션계는 최근 문학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올해 초 뉴욕에서 열린 톰브라운 가을·겨울(F/W)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서 영감을 받았다.
발렌티노는 부커상 후보자였던 한야 야나기하라의 글을 2024년 봄·여름(S/S) 남성복 컬렉션에 새겼다.
미우미우는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문학 클럽 ‘Writing Life’를 선보였다. 유럽의 문학 살롱에서 영감을 받은 이 프로그램은 19세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현대 여성 소설을 조명했다.
전문가들은 텍스트가 최근 패션 트렌드인 ‘조용한 사치(quiet luxury)’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분석한다.
지난 몇년 간 힙합, 스케이트보드 등 스트릿 문화가 휩쓸자 패션업계는 래퍼, 일러스트레이터, 스케이트보더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로고를 과시하고 명품을 휘감는 ‘플렉스’ 단어도 이때 나왔다.
하지만 현재 패션계를 강타하는 트렌드는 '조용한 사치'와 ‘드뮤어’다. 사전적으로 ‘얌전한’ 또는 ‘조용한’을 뜻하는 ‘드뮤어’는 클래식하고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말한다. 독서가 열망의 대상이 된 이유다.
한 패션 브랜드 디렉터는 “패션 브랜드는 문학을 통해 단순히 의류를 넘어 스토리텔링을 전달할 수 있다”며 “문학과의 만남은 브랜드의 서사를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다면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을 사고 읽는 행위가 과시나 소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가 책을 읽는 이유가 정보와 이미지 폭격의 시대에서 피난처를 찾는 방식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루루 스미스는 “젊은 세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인터넷의 혼란에서 피난처를 찾는 방식”이라며 “넷플릭스 시리즈를 몰아보고 이미지의 폭격에 빠지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휴식이다”라고 말했다.
동네 서점이 인기를 얻는 것도 이런 현상과 맞닿아 있다. ‘책만 팔아선 적자를 면할 수 없다’는 동네 서점은 지난해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주식회사 동네서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운영 중인 동네 책방은 884개로 전년보다 69곳 늘었다. 2018년 416개에서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들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책을 큐레이션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2030 여성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골목상권의 핵심 경쟁력인 콘텐츠와 감성의 역할도 맡고 있다. 동네서점은 책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한 독서 모임이나 작가와의 만남, 문화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성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문화평론가이기도 한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짧고 강렬한 이미지는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줄 수 있지만 문자 너머의 서사를 이해하고 세상과 사람과의 깊이 있는 연결성을 선사하는 건 문학만이 할 수 있다”며 “전 세계인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단절을 경험했고 세상과 더 강렬하게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거꾸로 텍스트 열풍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