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박사 1000명 길러낸 '인재의 숲'

입력 2024-10-17 17:46   수정 2024-10-18 00:26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다. 석유는 한 번 쓰면 없어지지만, 인간의 능력은 사용할수록 향상되고 가치가 커진다.”

인재를 키우는 데 진심이었던 SK그룹(당시는 선경)의 선대 회장인 최종현 회장의 지론이다. 최 회장은 취임 첫해인 1973년 광고주를 못 구한 MBC ‘장학퀴즈’ 후원을 결정했다.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조건 없이 돕겠다”는 뜻이 51년째 이어지는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을 탄생시켰다. 중간에 방송사가 MBC에서 EBS로 바뀌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시청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이듬해인 1974년엔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100년을 내다보고 선경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인재를 키우겠다는 의지였다. 재단 이름에 회사를 드러내지 말라고도 했다. 해외 유학이 하늘의 별 따기였던 인문사회 계열 인재를 선발해 철저한 사전 교육과 함께 파격적인 유학비용과 생활비를 지원했다. 당시 강남의 소형 아파트가 400만원대였는데 연 500만원을 보내줬다. 기업 규모가 지금처럼 큰 것도 아니고 오일 쇼크로 모두가 어려운 때였다. 자기 회사를 이끌 인재도 아닌데 아무 조건 없이 거액을 들이니 임원들이 싫어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사재인 남산의 건물과 토지를 내놨다. 그리고 오지의 민둥산을 사서 자작나무, 흑호두나무 등 경제성이 높은 나무를 심었다. 안정적인 장학금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반세기 동안 나무들은 쉼 없이 자랐고 민둥산은 어느새 울창한 숲이 됐다. 올해 50돌을 맞은 고등교육재단의 장학생 중 박사가 1000명에 달할 만큼 대한민국 인재의 숲도 풍요로워졌다. 지금은 연 30명의 해외 유학생 파견뿐 아니라 고전 교육, 학술 지원 등 인재 양성의 폭도 넓어졌다. 장학생 출신들은 찾아가는 강연으로 지식 나눔에 열심이다. 보여주기가 아니라 뚜벅뚜벅 ‘인재 보국’의 뜻을 이어간 결과다. 남다른 기업가정신의 최 회장이 ‘불법 비자금으로 회사가 컸다’는 판결을 들었다면 하늘에서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김정태 논설위원 inu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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