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기에선 '가챠(확률형 아이템 뽑기) 기계'가 있어야 장사가 돼요. 매장 들어오는 손님은 거의 없는데 가챠 기계 앞은 여러 명씩 서 있어요. 재고를 기계에 넣으니까 같은 제품인데도 잘 팔린다니까요."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의 국제전자센터 9층.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자마자 화려한 외형의 각종 가챠 기계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에서 굿즈샵을 운영 중인 20대 이모 씨는 "피규어 성지가 아니라 이젠 '가챠 성지'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초 매장 앞에 50여대의 기계를 설치했다. 이씨는 "지난 토요일 각 기계에서 나온 매출이 최소 20만원"이라며 "가챠 기계가 없으면 더 이상 이곳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피규어 성지'로 주목받던 서울 국제전자센터가 MZ(밀레니얼+Z) 세대 사이에서 가챠 성지로 부상하고 있다. 피규어와 관련 없는 업체까지 가챠 기계를 들여놓으며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상인들은 가챠 인기 덕에 상권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피규어 성지'에서 '가챠 성지'로 변모해
그러다 최근 해당 층이 가챠 성지로 변모했다. 경기 침체로 인해 생존을 모색하던 일부 업체가 들여놓은 가챠 기계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타면서다. 이젠 피규어를 구입하러 오기보단 가챠 기계를 써보는 것 자체가 목적인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고 한다.
이날 한 피규어 전문점 앞에도 가챠 기계로 각종 상품을 뽑는 이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이들은 혼자 혹은 연인과 함께 이곳을 찾아 매장 앞 가챠 기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피규어 매장이 다양한 종류의 기계를 들여놓은 상태라 9층 전체가 마치 커다란 '가챠샵' 같았다.
남자친구와 이곳을 찾은 20대 대학생 황모 씨는 "워낙 종류가 많아 30분 넘게 돌아다니면서 기계를 골랐다"며 자신이 뽑은 미니 피규어 상품을 보여줬다. 그는 "평소 피규어에 별 관심이 없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오늘 처음 방문했는데 진짜 특이한 곳 같다"며 "그냥 쇼핑하듯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재밌다"고 말했다.
20대 김모 씨는 "원래 다른 목적으로 센터를 방문했다가 가챠 기계를 한번 구경해보려고 9층을 들렸다"며 "2~3년 전까지 피규어를 사려고 이곳을 자주 찾았었는데 그동안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오히려 가챠 기계가 주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 있던 가챠 기계는 이전에도 흔히 '뽑기'라고 부르는 동전을 넣는 식으로 몇몇 업체에 설치돼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카드 계산이 가능한 전자식으로, 일본에서 유행 중인 가차샵에 있는 것과 유사한 기계들이 대부분이다. 가격도 2000원에서 7000원대로, 상품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이곳에서 인기 있다는 일본 애니메이션 '방가방가 햄토리' 관련 가챠 기계를 이용해봤다. 중앙에 있는 키오스크를 통해 원하는 가챠 기계 상품을 고르고 카드 결제하면 해당 기계에서 자동으로 플라스틱 캡슐이 굴러 나왔다. 캡슐을 열어보니 주인공 '햄토리' 인형이 들어있었다. 업자는 "바로 햄토리를 뽑는 경우가 흔치 않은 데 운이 좋다"며 "가챠는 바로 이런 재미"라고 말했다.
평소 국제전자센터 내 다른 층 상인들 사이에선 "9층만 장사가 된다"는 볼멘소리가 쏟아졌지만, 사실 9층 피규어 업체 상인들 역시 그간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하락한 매출은 이후에도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상인들은 최근 가챠 열풍이 불면서 뽑기 기계가 이젠 매출의 일등 공신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아예 피규어 매대를 줄이고 가챠 기계를 전문적으로 들여놓은 곳도 등장했다. 50대 성모 씨는 8개월 전 가챠 기계를 들여놓으면서 사실상 '가챠샵'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그는 "피규어는 공산품처럼 인기 제품을 대규모로 들여놓아 마구잡이로 팔기가 어렵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된다"며 "요즘은 가챠 기계 덕분에 먹고 산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피규어와 관계없던 다른 업종들마저 가챠 기계를 들여놓으며 손님을 끌고 있다. 같은 층에 있는 비디오 게임 콘솔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40대 업주 강모 씨는 "두 달 전 가챠 기계를 들여놓았는데 반응이 좋아 2주 전 추가로 설치했다. 하루에 나가는 캡슐이 기계당 120~130개로, 주말엔 500개까지도 나간다. 본업보다 매출이 더 나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인근에서 24년째 게임 콘솔 업체를 운영한 50대 이모 씨는 "가챠 성지로 여기가 뜨면서 업종 무관하게 대부분 업체가 기계 들여 넣기에 바쁜 상황"이라며 "단골 장사라 아직 괜찮긴 하지만, 지금 비디오 게임 업계가 너무 불황이라 내년엔 기계를 20대 정도 들여놓을까 고민 중"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본 내 한국인 관광객들의 가챠샵 수요가 높다보니 일본 피규어 제작 업체인 반다이남코는 한국 지부를 통해 앞선 2월 국내에 공식 가챠샵을 열기도 했다. 현재 홍대, 신촌 등 주요 상권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챠샵들이 속속 들어선 상황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사실 온·오프라인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제품을 '뽑기' 형태로 구매한다는 것은 소비의 가장 큰 요인이 '재미'라는 뜻이다. 키덜트 문화 역시 '재미있는 소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여기에 일본 현지에서 느꼈던 재미를 국내에서도 얻을 수 있다 보니 최근 가챠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polit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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