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삼성의 위대한 유산

입력 2024-10-23 17:39   수정 2024-10-24 00:20

삼성전자는 인텔처럼 파운드리 사업을 떼어낼 수 없다. 인텔은 주주들의 압력을 못 이기는 척 적자 사업 파운드리를 분사했다. 항복 문서를 쓰는 데 체면이나 명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삼성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본체에서 분리된 사업부가 1년에 2조원의 적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투자와 운영비는 누가 충당할 것이냐의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또 어느 구성원이 앞날이 먹장구름 같은 신설 회사로 선선히 걸어 들어가겠나. 강성 노조와 경영자 배임이라는 갈고리가 작동하는 한국적 현실에선 해결 불가다.

삼성 반도체의 3각 축인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LSI, 파운드리는 죽으나 사나 한 덩어리로 있어야 할 운명이다. 더욱이 파운드리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향후 30년의 명운을 건 이 전장에서 패퇴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 그나마 건재한 메모리도 파운드리의 뒷받침이 없다면 경쟁력 약화가 불가피하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같은 첨단 반도체 주자들의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시장은 글로벌 빅테크가 반도체 칩을 설계하면 대만 TSMC가 거의 다 받아먹는 구조다. 삼성의 위기는 TSMC가 너무 막강하다는 데 있다. 반도체 제조 능력의 최종 잣대인 ‘설계 IP(intellectual property)’의 격차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IP는 반도체의 특정 기능을 구현하는 회로 블록을 뜻한다. 이 자산이 많고 다양할수록 고객이 원하는 칩 성능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다. 제조업에서 공구가 서너 개인 곳과 30~40개에 달하는 기업의 차이를 떠올려 보라. 삼성이 못나서가 아니다. 삼성이 주력인 메모리로 돈을 쓸어 담는 동안 TSMC는 파운드리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기술과 경험을 쌓아왔을 뿐이다.

이런 격차는 단기간에 좁힐 수 없다. 말 그대로 초격차를 당했다. 누구보다 이재용 회장이 답답하고 애타는 심정일 것이다. 무엇 하나 미더운 구석이 없다. 사법·노조 리스크가 살아 있고 일사불란함을 자랑하던 조직은 어느새 타성에 젖었다. 그럼에도 한숨과 탄식은 섣부르다. 삼성은 여전히 대단한 기업이다. 지난 20년간 국내 우수 인재를 모두 쓸어 담았다. 관건은 구슬을 꿰는 것이다. 사회나 국가에 ‘집단 기억’이 존재하는 것처럼 삼성처럼 신화를 창조한 기업에도 ‘코퍼릿 메모리(corporate memory)’라는 것이 있다. 다른 기업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다. 이런 집단기억은 한두 번의 실패나 한때의 위기로 사라지지 않는다. 삼성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지금 한국에서 앞날을 보장받은 기업은 하나도 없다. 모두 미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 임직원의 야성과 책임감을 복원해야 한다. 인적 쇄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이 젊고 비전이 있는 인재들을 발탁해야 한다. 조직에 쓴소리하면서도 대안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연령 중심의 임원 승진 기준도 재검토 대상이다. 나이가 많다고 덜 진취적인 것은 아니며, 어리다고 무조건 생각이 젊은 것도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경영자(CEO) 자신이 현장의 디테일을 모두 꿰뚫고 있어야 한다. 임원 토요 근무제 도입도 현장 리더십 복원을 위한 것이었을 터. 여러 업종을 꾸려나가는 기업 총수들에겐 무리한 주문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선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질문과 대답이 가능하고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 질문을 피하는 사람, 질문에 답이 없는 사람, 엉뚱하게 남 탓을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걸러진다.

기술 자산도 마찬가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폐기한 것 중에 되살릴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혹여 누군가의 고집이나 편견으로 사장된 것은 없는지, 미래 과제로 미뤄둔 것 중에 당장 도전할 만한 것은 없는지 하나하나 서랍에서 꺼내 살펴봐야 한다. 삼성은 워낙 방대한 제국이어서 어느 구석에 어떤 기회가 살아 숨 쉬는지 알기 어렵다. 시일이 걸려도 모두 재점검해야 한다. 사방에 파도가 일렁거려도 배의 선장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꿈과 도전이 살아 있는 기업은 절대 가라앉지 않는다. 삼성 ‘코퍼릿 메모리’의 진수도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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